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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은 저녁에 마시는 거라고, 누가 정했을까.
특별한 날에 마시는 거라고, 누가 정했을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와 함께일 때, 예쁜 잔에 따라서, 적당한 조명 아래서. 나는 그 모든 전제를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샴페인에는 이유가 필요하다고. 이유 없는 샴페인은 왠지 쓸쓸하다고.
그런데 어느 화요일 정오에, 나는 혼자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미니 샴페인 한 병을 땄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발단은 사소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고 앞에서 무심코 음료 칸을 훑다가 — 작은 샴페인 병이 눈에 들어왔다. 200ml짜리. 가격은 기억나지 않는다. 비싸지 않았다. 나는 그걸 집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었다.
지금 이걸 사면 어디서 마시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서'와 '언제'와 '누구와'를 먼저 따졌는지를 깨달았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마음보다 먼저 조건을 계산했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 자체가 잘 들지 않게 됐다.
나는 샴페인을 계산대에 올렸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는 불편했다.
햇빛이 생각보다 강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힐끗 쳐다봤다.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 개의치 않는 척하다가 진짜로 개의치 않게 됐다.
병을 땄다. 작은 소리가 났다. 퍽.
그 소리가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나는 병을 들었다. 잔이 없었다. 잔 없이 병째로 마셨다. 탄산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시원하고 약간 달고, 낮의 햇빛 아래서 마시는 샴페인은 저녁보다 훨씬 가벼운 맛이었다.
건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였다. 부딪칠 잔이 없었다. 나는 병을 허공에 살짝 들었다.
무엇을 위해 마시냐고? 아무것도 아닌 오늘을 위해.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이유를 요구한다.
왜 혼자 밥을 먹냐고. 왜 평일에 영화를 보냐고. 왜 아무 이유 없이 꽃을 샀냐고. 왜 오늘 기분이 좋냐고 — 좋으면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우리는 기쁨에도 영수증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근거 없는 행복은 불안하고, 설명 안 되는 즐거움은 왠지 가벼워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다린다.
승진하면, 결혼하면, 뭔가 이루면, 그때 샴페인을 따겠다고. 그때 좋은 음식을 먹겠다고. 그때 나를 위해 뭔가를 하겠다고. 그런데 그 '그때'는 자꾸 미뤄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그때'를 끝내 맞이하지 못한 채 평범한 화요일을 너무 많이 흘려보낸다.
정오의 샴페인은 그래서 발칙하다.
이유 없이 기쁠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200ml는 금방 바닥났다.
나는 빈 병을 손에 들고 잠깐 앉아 있었다. 배가 약간 따뜻했다. 탄산 때문인지 알딸딸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점심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일어났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오늘 오후는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다. 일이 달라진 것도 없고, 세상이 달라진 것도 없는데. 다만 나는 오늘 정오에, 아무 이유 없이, 혼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병째로, 샴페인을 마셨다.
그것만으로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 됐다.
다음번엔 조금 더 좋은 걸로 살 생각이다.
잔도 챙겨야겠다. 그늘진 벤치도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그냥 또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도 나쁘지 않다. 중요한 건 잔도 벤치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이유 없이 기뻐하는 연습이다.
매일 조금씩. 가랑비처럼.
샴페인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마시는 게 아니다.
샴페인을 마시면, 그 순간이 축하할 일이 된다.
Meeting Point 36.473018, 127.142031 April 15(WED) 13:00 A man drinking champagne
04화에서 계속됩니다. 이름 없는 역에서 무작정 내리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