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쓰기 #5

책장 앞

by Untitled

이사 준비로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장의 책을 비우고 있다. 세로 여섯 칸, 가로 네 칸의 밝은 나무색 책장이다. 신혼 때부터 10년을 넘게 썼다. 아이들의 책들, 우리 부부가 각자 모아 온 책들이 여기에 넘치도록 담겨있었는데 하나둘 보내줄 곳을 찾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했던 동화책 전집은 시조카에게 주기로 하고, 조카와 연령이 안 맞는 책들은 당근과 알라딘에 보낸다. 책장에서 내려, 더러운 것을 닦고 차곡차곡 정리해서 노끈으로 묶어 책장 옆에 쌓아 두었다. 책을 정리하기 시작하니 오히려 거실 바닥까지 전부 책으로 점령당해 버렸다.


오래 걸려서 그렇지 아이들의 책 정리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내 책 정리다. 특히 대학원 전공과 관련된 책을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을 버려도 될까, 또 필요하지 않을까, 이건 조금 더 읽어봤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정말 도움이 되었지, 잘 보관해 두면 또 읽지 않을까 하는 여러 생각이 이 책을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게 만든다. 중고 판매 쪽 분류로 옮겼다가, 다시 보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뺐다가, 그래도 결국 버리기로 결심한 책들을 모아 정리했다. 지금 그 박스 중 하나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글을 쓴다.


나는 버리기를 어려워한다. 아직도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모든 편지들을 모으고 있고, 내가 썼던 모든 휴대폰은 물론이고, 친구와 주고받은 쪽지들과 어릴 때 썼던 유치한 열쇠고리, 어디선가 주워 온 예쁜 돌과 심지어 내가 난생처음 마신 맥주의 병뚜껑까지도 가지고 있다. 아주 사소한 기억이 담긴 누군가에겐 쓰레기처럼 보일 것들을 계속 저장한다.


그런데 책은 이런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는 좀 다르다. 책 저장은 내 부족함에 대한 집착이나 강박으로 시작한다. 한 번 읽은 이후로 다시 펼쳐보지 않은 책인데도, 펼쳐보지 않을 책인데도 그게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불안함. 혹은 언젠간 보겠지, 언젠가는 이 책이 남아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겠지 하는 기대나 바람 같은 것들이 책장과 창고를 채우고 있다. 실은 창고에는 대학교 때부터 써 온 모든 전공책, 참고 서적, 필기가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정리해야 할 시점이 되고 그렇게 모아 온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펼쳐 놓고 보니, 내가 너무 나의 부족함이나 채워야 할 구멍에 대한 강박으로 내 책장과 삶을 채워오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버리진 못하지만 다시 봐야할 것만 같은 그런 책 말고, 조금 희귀해진 책 몇 권과 중요한 책, 추억이 담긴 책 몇 권을 빼고 모두 보내주기로 했다. 전부 비우지는 못했지만 꽤나 큰 비움이다. 후련한 마음도 든다. 이사 갈 그곳에서는 부족함에 대한 집착말고, 좋아하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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