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비올라
이우환과 친구들 2, 빌 비올라 <조우>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거리에는 벚꽃이 개화를 시작한 봄날, 미술관을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바짝 긴장했다. '오늘은 저 작품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늘 동시대 미술, 특히 회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전시장 벽면 한쪽 크지 않게 새겨진 글자들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의 작품이 가장 의미 있게 존재하는 장소는 미술관 전시실도, 텔레비전도 그리고 비디오 화면 그 자체도 아니다. 그곳은 바로 작품을 보았던 관객의 마음속이다."
-빌 비올라
비올라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나는 내 마음대로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할 각오를 다지며 전시장에 입장한다.
제1 전시실에 들어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Anima,2000)은 흡사 누군가의 사진 초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고양이에게 하듯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시장을 둘러본다. 제1 전시실의 작품을 감상하며 머릿속에 맴돌았던 가장 중심적인 생각은 '과연 저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지점이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놀라움의 5중주(The Quintet of the Astonished, 2000)는 그 부분에서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작품 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터트리며 울부짖는 사람,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은채 아주 깊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 슬픔을 억누르며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는 사람, 황홀경에 빠져 넋을 놓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며 개인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감정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화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들이 바라보는 것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슬픔의 대기에 둘러싸인 네 명과 어딘가 동떨어진 듯한 감정을 보이는 한 명. 어느 찰나, 나는 '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우리가 신을 찾을 때, 신을 바라볼 때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신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저는 어떡해야 하죠?
저는 이제 너무 지쳤어요.
이제 가망이 없대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대게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더욱 신과 가까이 마주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다시 작품을 바라보니 혼자만의 황홀경에 빠져 있던 이상한 노인은 아주 위대하고 지혜로운 현자의 형상으로 바뀌어 보인다. 그에게 신이란 울며불며 매달리는 존재가 아니라 생의 기쁨을 감사드리며 황홀한 순간을 나누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작품 속에 비치는 사람들의 실체와 평가가 달라지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나는 어떤 종교적 신을 떠나서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오늘만은 나의 신에게 감사를 보내고 생의 기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두운 공간을 빠져나온다.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 2000
세 번째 전시실의 이노센츠(2007)를 보자마자 나는 아담과 이브가 떠올랐다. 아담과 이브를 떠올려서 일까? 작품의 제목이 내포하는 의미처럼 그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먼 거리와 노이즈가 가득 낀 흐린 화면만큼이나 그들의 결백을 믿기는 어려운 듯한 느낌이다. 나는 그들의 눈동자와 입술의 떨림 그리고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바짝 가까이 다가오길 바라며 화면을 응시한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빛을 뿜으며 선명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 또한 그들이 외치던 결백과는 거리가 먼 인간임을 깨닫고 그들과 나, 우리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는 도중 그들은 다시 걸음을 돌려 무색의 흐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이 선명했던 그 잠깐의 순간은 마치 인생을 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찰나의 순간과도 같다. 우리는 무수한 깨달음을 얻지만 그것은 찰나이다. 우리가 그 많은 깨달음을 모두 몸과 마음에 기록하고 지속한다면, 신이 아닌 인간이 있을까.
세 번째 전시실의 또 다른 공간에는 순교자들(2014)이란 타이틀의 4개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에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저항과 위협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소멸을 맞이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위협받을 때 그것의 존재와 가치는 더 커지고 소중해지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도 걸 수 있게 된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를 괴롭혔던 현실의 것들이 사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귀중한 것들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도 찰나일 것이다. 이 공간을 나가 잔디밭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길고 깊었던 생각은 짧고 얕아져 결국엔 투명한 상태로 나를 통과해 갈 것이다.
본관의 마지막 전시실을 나오며 내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였다. 내게 주어진 관람시간은 총 두 시간. 남은 시간은 5분 남짓이었다. 시립미술관 본관을 뛰어나가 이우환 공간으로 향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젖은 땅이 찰랑거린다. 나는 이 공간에 전시된 비올라의 작품을 보는 대신 이우환의 작품 한 점을 보고 가기로 한다. 추상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준 작품이었다. 그때는 꽤나 심각한 질문을 던지던 작품은 이제는 꽤 가벼워져있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추상이 주던 무거움을 조금은 이해할 만큼 내가 성장한 것 같아서였다.
마지막 전시실,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2002) 코로나 시대의 예절을 지키기 위해 나는 급하게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미술관 정원을 걸어 나오며 친절하게 작품 설명이 되어있는 리플릿을 이제야 꺼내보았다. 나의 감상과 일치하는 지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비올라가 말했듯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에 그의 작품이 어떻게 읽히고 기억되는가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겁 없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길 바라며 점점 투명해질 오늘의 기억을 가지고 미술관을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