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무던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모든 인간관계에 꽤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했었다. 누군가에게 항상 ‘좋은 사람’, ‘쿨 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고,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상대방과의 관계가 드디어 궤도에 진입한 것이리라 홀로 안도했다. 그러면, 또 그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날카로운 유리인 것 마냥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마도 여기에는 조금 특별한 인과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존감의 저하와 맞물려 있다.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고독과 불안은 ‘혼자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도피하고 싶은 현실은 고독과 불안을 부추기는 촉진제 역할을 하면서 ‘현실 속 진짜 내 모습’을 외면하도록 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 상태에서 공허함만이 배가되니, 그것을 메우기 위해 친하다고 판단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애쓰게 된다. 적어도 그 시간을 보낼 때만큼은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십 대가 가까워지는 이 시점에 나는 원만하기만 한 인간관계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달아버렸다. 해가 거듭되면서, 진짜와 나머지들이 자연스럽게 가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의 증가와 뚜렷한 정체성의 확립이 더해지면서 표피적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과의 괴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생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고가 유연해지면서, 누구도 ‘내 사람’의 필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동안 내가 너무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관계 실패는 오히려 나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고, ‘같은’ 사람들은 보다 더 집중적으로 챙기게 되었다. SNS로 비롯되는 사회 관계망에서 현실 관계망으로의 전환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나는, 소수의 진짜배기 사람들과 나누는 깊은 소통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형식적 관계에 걸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가지 치듯 인위적으로 정리할 생각은 없다. 그냥 그러한 상태로 두면 되는 것이다. 소위 ‘무던해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와 유사하다. 여유를 가지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찾아오는 혹은 떠나는 관계들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다만, 그 속에서 깊이가 느껴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면 아낌없이 연대해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