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 아니 우리를 탓하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가식적이냐고, 언제부터 그렇게 감정이 메말랐냐고, 질타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도시 생활이 가져다주는 편익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 ‘편익’이라는 것이 반경 몇 킬로미터 내에 위치한 대중교통 시설과 종합병원, 각종 공공기관과 동네마다 하나씩 자리 잡은 대형마트를 의미하는 바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가장 중요 시 해야 할 인간적 유대와 진정성 있는 관계 같은 것들이 갈수록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거대한 공동체의 내부는 실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억제된 감정과 부풀려진 허영으로 가득 찬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진지한 소통을 한다는 것이 영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씩 나는 이 도시의 부조리함에 환멸을 느끼곤 한다.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번화가의 불빛 아래를 걷다 보면 땅바닥에 버려진 퇴폐업소 광고 전단지들이 아무렇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내 옆을 쌩 하고 지나가는 독일 산 스포츠카가 뿜어대는 전자음악을 동시에 체감하는 때가 되면 체통 없는 금수저 이리라 판단되는 그 차 속의 운전자가 거듭 밟히고 밟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전단지 속 여자를 무시하고 학대할 것만 같은 기묘한 상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을 그리 방치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찰나의 책임감에 고무되다가도 이내 그 스포츠카를 한 번쯤 몰아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참 알다가도 모를 ‘도시인’, 아니 ‘인간’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속 주인공, 트래비스 버클이 떠오른다. 뉴욕의 화려함, 그 이면에 감춰진 더럽고 추악한 모습들을 차마 견디지 못해 자신이 그 모든 부조리함을 심판해야 한다고 여겼던 어설픈 영웅. 사회 부적응자의 위치에서 의도치 않게 시민영웅이 된 트래비스가 어두운 뉴욕의 밤거리를 향해 사라지며 백미러를 훔쳐보는 마지막 장면의 그 눈빛은, 우리들의 시선과 일맥상통한다. 정확한 대상은 없지만 무언가 바로잡고 싶은 수동적 정의감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이 도시가 좋다. 자유주의는 이곳을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꿈의 무대로 조성해 놓았다. 그 꿈의 무대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미 넘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분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더 넘쳐나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도시인’으로서의 삶에 더 이상 어떠한 환멸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