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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Apr 30. 2023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인터뷰 전날 밤.


나는 시애틀의 어느 호텔 방 안에서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에 봤던 그 영화.


아마도 나는 시애틀이라는 장소의 존재를 그 영화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서 봤던, 성형으로 얼굴이 망가진 맥 라이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때는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안타깝다.


뭐든지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게 좋은 거라고 하던데.

그것을 억지로 거스르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일까?


순간 내가 먼 미국에,

그것도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이 낯선 시애틀이라는 곳에서

다음 날 있을 인터뷰를 보기 위해 어느 호텔 방 침대에 혼자 누워있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순리를 억지로 거스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주체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다다르게 될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


다음 날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뷰가 예정된 건물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 자리엔 총 5명의 사람들이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모여 있었고

곧이어 보라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어느 디자이너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자신의 강아지를 함께 데리고 들어왔다.


‘이곳은 강아지를 회사에 데리고 출근해도 되는구나.’


그 강아지는 낯선 사람인 내게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 보라색 머리의 디자이너는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며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긴. 오히려 덕분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렇게 나는 6명의 사람들과 강아지를 대상으로 포트폴리오 리뷰를 마쳤고


이후 그 6명과 돌아가면서 1시간씩 별도의 1:1 인터뷰를 보았다.


사실 인터뷰의 순서 중 내게 가장 부담이 되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이트 보딩 챌린지’라는 순서였다.


이는 주어진 주제에 대한 디자이너의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UX 디자인 인터뷰의 한 가지 방법으로, 실제 현업에서 동료들과 회의를 하듯이 화이트보드에 직접 글씨를 쓰며 솔루션을 도출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일 날 어떤 주제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성공과 실패가 많이 좌우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날 내게 주어진 주제는 ‘카약 대여 서비스에 대한 경험’을 만드는 것이었다.


‘카약…이라고?’

 

이름만 들어봤지 당연히 내 평생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다.

아마 실제로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걸 대여할 수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


순간 그 주제를 보고 살짝 당황했지만

오히려 카약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편이 실제로 아이디어를 풀어내는데 더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용자에 대한 페르소나를,

‘처음 시애틀에 관광 온, 카약을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사람’으로 잡았고 (사실은 그게 나다!) 그 사람이 카약을 처음 빌릴 때 겪게 될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상상하며 아이디어를 전개시켜 나갔다.


다행히 상대방 디자이너는 내 아이디어에 호응을 많이 해 주었고 많이 긴장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꽤 유쾌하고 즐거운 1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1시간의 화이트 보딩 챌린지 이후

케이티라는 이름의 파란 눈의 백인 여자 디자이너는 본인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굿 럭”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 뒤로 마지막 사람과의 1:1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갔다.


리쿠르터는 조만간 결과가 이메일로 통보될 거라며 시애틀에 처음 온 내게 주변에 갈 만한 곳을 추천해 주는 친절함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와 웃으며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서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인터뷰를 잘 본 건지 못 본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호텔에 들어와서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시애틀 거리로 나왔다.


여름인데도 생각보다는 조금 서늘한 저녁의 온도.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다시 오늘의 인터뷰를 생각해 보니 몇몇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불 킥이 생각 날 만큼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나는 하루종일 힘들게 인터뷰를 봤으니 일단은 최대한 머리를 텅 비우고 싶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말로만 듣던 시애틀의 명물인 ‘스페이스 니들’ 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이렇게 인터뷰를 위해 예정에도 없던 시애틀에 갑자기 오게 된 것,

그리고 내 앞에 저 스페이스 니들이 서 있는 광경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얼마나 예상치 못한 선택의 순간들로 채워지는가.


그 순간들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했든 그 순간의 시간 들을 최선을 다해 살아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나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유명한 시애틀에서


아주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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