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지겨운 T에게

13.7.13 뮌헨 영국정원에서

by 허용운

안녕 T야! 지난달 어느 토요일, 너와 서울숲에 간 적이 있지. 잔디밭엔 맑은 날씨와 자연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어. 파란 하늘 아래서 우리는 자리를 깔고 누워 우리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고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지겨운지, 집값은 왜 이리 오르는지, 어떻게 독립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린 여태 이런 좋은 곳을 누리지 못했는지 이야기했어. 그러다 앉아서 맥주 한 모금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봤어. 반려견과 뛰어노는 사람들, 손잡고 걷는 연인들, 아예 상을 가져다 놓고 음식을 먹는 가족들,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 보였어. 그 순간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느꼈어. 여행 온 느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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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야! 독일의 몇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어. 난 독일에 특별한 호기심이 없었어. 같이 간 친구의 지인이 베를린에 있기도 했고 입국하기 편하기도 해서 그냥 독일부터 시작했어. 일기장에도 "독일은 관광지의 매력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진 않지만 굉장히 살기 편할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써놨어. 도대체 관광지의 매력은 무엇이고 살기 편한 곳의 기준은 뭘까? 이젠 모호해졌어. 뮌헨에서 했던 활동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일기장을 찾아봤어. 박물관 갔다가 소시지 먹고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어. 미술관에 갔다가 누드 비치라 불리는 영국정원에서 우리가 서울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광욕을 하고 맥주를 마셨어. 디즈니 영화 로고의 모델이 된 성에 갔다가 주변 호수 구경하고 맥주를 마셨어. 그땐 몰랐는데 정말 축제 같은 하루를 보냈구나 싶었어. 그러다 이 정도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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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야! 우리의 일상이 너무 치열해서 그 와중에 나타나는 소소한 행복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어쩌면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의 가치는 힘든 상황 속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순간을 회상할 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즐거움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를 누려야 할 것 같아. 언제 어떤 기억이 우릴 행복하게 할지 모르니까.


2021.10.16

항상 권태와 씨름하는 너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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