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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ul 14. 2019

야만에 대처하는 법

어느 날 누군가에게 야만스런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대부분의 야만은 ‘힘’이 ‘공정함’을 거스르는 순간에 나온다.  


자기보다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일진들은 얼마나 야만스러우며, 부하직원을 성추행하는 상사는 얼마나 야만스러운가. 그들은 자신이 가진 힘이나 권위가 상대방이 누려야 할 자유보다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공식적 룰이지만, 그런 룰이 번번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누군가의 야만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건 아직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힘겹다. 현실적으로는 공정하지 않은 힘과 권위가 아직 우리 사회에 유효하기 때문이다.


야만이 가시지 않은 국제사회


얼마 전 우리는 일본 정부로부터 야만스런 일을 당했다. 타당한 근거나 명분 없이 일본은 자국 내 물자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우리의 야만이 명분을 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박근혜 정권 때 맺은 위안부 합의를 우리가 뒤집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국가 간의 합의를 저버린 것은 국제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실례라면서 말이다. 정말 그러할까?


이들은 어째서 일본이 먼저 고노담화를 저버린 것은 이야기하지 않을까?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 이래 2010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식민지배시대의 잘못을 사죄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포함하는 아시아의 피해국들은 물론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수차례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 담화들은 “이제 일본은, 힘으로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이 야만적 행위라는 데에 확실히 공감하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에 있어 두 번 다시는 일본에 의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선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2014년 아베 정부는 돌연 입장을 바꾸어 고노담화검증팀을 꾸렸다. 그리고 2달 뒤 담화의 정신을 폄훼하는 파렴치한 보고서를 내며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이 저지른 모든 행위의 범법성은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이런 행동은 과연 신사적인가?


비단 일본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신사적이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슬프게도 아직까지 충분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힘으로 합병했고, 2017년 트럼프는 파리 기후 조약을 일방적으로 탈퇴해 버렸다. 아직 국제사회는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 5천만의 작은 나라 한국이 강대국으로부터 야만스런 일을 당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과연 무엇일까?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조치


야만이란 곧 힘과 권위의 폭행이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감정적으로는 더 큰 힘으로 뭉쳐 상대방에게 똑같은 일격을 가하는 낭만적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필자의 남편은 2년째 교수와 소송 중이다. 교수는 남편의 논문을 표절했다. 남편에게 표절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을 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건 하나야. 사회가 공정하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들을 믿고 가보는 수밖에. 사실상 그거밖에 없어”


맞는 말이다. 사실상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 아니, 해야 할 일이란 하나밖에 없다. 이 사회가 그런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들을 믿고 따라가 보는 것 말이다.


공정함을 위한 실제 싸움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구체적이고 지루하다. 그런 시스템들을 이해하고 전방위적으로 자료를 갖추어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열심히 설득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부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다. WTO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했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외교적 도움을 얻고자 뛰고 있다.


너무 미약해 보이는가? 그런 시스템들이 과연 공정하게 작용할지는 의문인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승리가 약속된 다른 방법이 있지 않으며, 질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멈춰야 할 싸움도 아니다. 그저 전방위적으로 집중하며 한발 한발 내딛어 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밟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역사교육과 먼 두 나라 1-일본


가끔 TV에서 욱일승천기를 높이 들고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을 찬양하는 일본의 젊은이를 볼 때가 있다. 그 젊은이들은 일본이 군국주의 시절에 주변국은 말할 것 없고 자국민에게조차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실상 일본의 야만, 아니 일본 정부의 야만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괴이하다.


주변국에게 “일본은 두 번 다시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을 나라인가?”의 답이 모호한 것만큼이나,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을 보호하는가?”의 답 또한 모호하다.


일본 정부는 전쟁 막바지에 자국 농민들을 무리하게 만주와 몽골 지역 등으로 이주시켰다. 이른바 '만몽개척단'満蒙開拓団이라는 미명 하에 고향에서 타지로 옮겨진 그들은 패전 뒤 아무런 보호조치 없이 만주에 버려졌다. 관료와 군인들이 자국민에 대한 보호조치 없이 먼저 떠나버린 것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지에서 타국의 농민들을 착취하도록 강요받았던 만몽개척단의 말로는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아사히 TV에 따르면 남아있던 관료들은 만몽개척단의 어린 여성들에게 소련군과 중국군의 성접대를 하도록 종용했다. 여기 동원된 여성 중 4명은 현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귀국지원이 늦어지면서 이들은 점점 고스란히 주변의 모든 폭력과 살해,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 왜 아니겠는가. 일부는 결의 하에 집단 자결했고 어떤 이들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한때 24만 명에 달했던 개척단이었지만 1946년 일본으로 처음 돌아온 이들은 400명에 불과했다.

출처 : 뉴스 앤 조이. 효고현 탄토 쵸에서 발견한 '대 효고 개척단 순난자의 비'. 뒷면에는 '입수 자결하다'라는 글씨가 하얗게 강조돼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이 뿐인가. 일본 국민들은 종전 후 1년 뒤, 정부로부터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부가 갑자기 예금인출을 차단한다는 “예금봉쇄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저축해둔 돈으로 생활하던 모든 서민들의 생활은 졸지에 기댈 곳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당시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자그마치 2년의 예금봉쇄는 실제로 가혹하고 난폭한 조치였다. 단 몇 달의 생활비밖에 없었던 국민들은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강둑의 풀을 뜯어먹는 일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2년 뒤 봉쇄령이 풀렸을 때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예금의 가치는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 정부의 진짜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당시 일본의 재무상황은 최악이었다. 국채를 사서 전선에 총알을 보내자며 대책 없이 발행했던 국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종전 바로 직전인 44년 말에는 부채비율 204%에 달하는 재정위기 상황이 왔었다.


이를 갚기 위해 일본 정부는 국민이 가진 모든 재산(예금포함)을 파악해 10만엔 이상의 재산에 25-90%의 재산세를 징수해 국채를 갚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바로 그 재산 파악을 위해 예금을 봉쇄하고 재산세를 징수한 것이다. 결국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팔았던 국채를 다시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갚은 셈이다.


NHK가 이 내용을 2015년 다시 보도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은 실제로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예금봉쇄령 이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당시보다 높은 237.6%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재정위기가 닥쳤을 때 이제는 두 번 다시 국민들에게 예금봉쇄령을 내리지 않을 국가인가?


하지만 국민들은 점점 잊어간다. 독도가 일본땅일지 모른다는 교육을 받는 동안,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했던 실수들은 교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백한 것들을 명백히 하는 것은 때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누가 애국의 낭만으로 포장하려 든다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것은 자국의 국민들을 강제 죽음으로 내몬 야만적인 행동이며 인류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역사교육과 먼 두 나라 2-한국


반대로 한국에서는 가끔 SNS에서 일본 정부를 옹호하는 젊은이들을 본다.

더 심각한 건 한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 조차 공식적으로 “해방 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인해 국민이 분열됐다”는 발언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이 해방 후 친일청산을 하지 못해 그 후로도 지금까지 어떤 정치적 격변에 휘둘려야 했는지, 그것이 국가 경제 발전을 어떻게 발목 잡고 있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국민들을 분열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대체 역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걸까?

한때 가해자였던 상대와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빨리 잊는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적어도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가해자로선 동의한다면 ‘사과’할 수 밖에 없다.

사과는 그 동의를 위한 선결조건에 불과한데, 자신이 저지른 가해행위에 대한 사과마저 굴욕으로 느끼는 상대라면 그가 미래 가치에 동의한다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와 함께 미래를 그려갈 수 있겠는가?


상대의 야만을 여러 번 목도하고도, ‘만약에 우리가 그들에게 더 잘했더라면’이란 가설을 세우는 사람들은 아직도 야만의 본질을 모른다. 모든 야만은 그런 나약한 상대를 찾아드는 폭력이다.


적어도 100년 전과는 다른 싸움


한국 같은 작은 나라가 WTO나 외교에서 되도록 유리한 도움들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는 매사에 공정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매사에 인류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향해야 하며, 적어도 우리 정부는 국민을 대변하는 정부여야 하고, 적어도 우리는 주변국에 신사적인 행동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전 정부의 위안부합의는 인류의 미래지향적 가치에 부합하지도, 국민을 대변해서 이뤄지지도 않았다. 그런 합의를 신사적으로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한국 정부는 국민의 정서를 무시하고 국가 간 거래에 쉬이 합의하는 정부이며, 그들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의 내용을 바꾸지 않더라는 확신을 준다는 것은 두 번째 야만을 부르는 나약함을 우리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다.


필자가 하나 믿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정부는 적어도 국민을 위해 성실히 싸우고 있을 거라는 점, 적어도 지금의 불씨가 된 위안부합의 같은 수상한 합의를 들고 돌아오지는 않을 거 같다는 점이다. 부디 실제로도 그렇기를 바란다.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이 벌어졌고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다행한 것 하나는 지금의 한국은 1910년의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능한 왕실과 모자란 국제적 지식으로 우왕좌왕하던 100년 전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우리는 세계 경제 12위에 달하는 선진국이자 탄탄한 외교력을 갖춘 민주국가로 성장했다. 결과가 어찌 되건 적어도 그 사실 하나는 일본에게 똑바로 알려줄 기회다.


국민들이 장기전이 될지 모를 지금의 싸움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포퓰리즘'이다. 집단적 위기에 처했을 때 간혹 어떤 사람들은 당장 돌을 던질 수 있는, 돌을 맞을 누군가를 찾아낸다.


일본 연예인을 몰아내자고 하는 경우, 일본과 거래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한일 마찰 이전에 이뤄진 거래를 빌미로 기업을 매국노 취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매국노가 아니라 정치적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나라를 파는 행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수호하려는 자유무역이다. 피해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건 대중의 힘을 불공정하게 쓰겠다는 또 다른 야만이다.


물론 때로 그런 분노는 이럴 때 다 같이 뭉쳐서 더 큰 힘이 되었으면 하는 선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가끔 우리는 큰 분노가 더 큰 힘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통쾌할 것 같기는 하다. 우리가 하나로 뭉치고 그것이 곧 큰 힘이 되어, 자기 힘을 믿고 야만을 휘두르는 자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는 꿈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약소국의 힘은 그런 방식으로 통한 적이 없다. 실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 조치는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공정함에서 일본이 반칙을 하고 있음에 대해 다른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뿐이다.


낭만보다 지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국민들의 성숙한 태도를 글로벌하게 알릴 수 있다면, 지금의 난국에 조금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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