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이탈 리스크, 지급결제 인프라 변화, 은행의 새로운 생존 전략.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도입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재편할 잠재력을 지닌다. 2025년 현재, 중국의 e-CNY를 비롯해 유럽중앙은행(ECB)의 디지털 유로 시범, 미국 연준의 탐색적 연구가 가속화되면서 CBDC는 더 이상 이론적 논의가 아니다. 한국은행도 2024년부터 CBDC 시범사업을 확대하며, 2025년 내 실증 테스트를 추진 중이다. 이 변화는 상업은행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전망이다. 전통적으로 예금 유치와 중개 수수료로 생계를 유지해 온 은행들은 예금 이탈 리스크, 지급결제 인프라의 재편, 그리고 새로운 생존 전략 수립이라는 세 가지 축에서 근본적 도전을 맞닥뜨린다. CBDC는 중앙은행의 직접적 화폐 공급으로 은행의 중개 역할을 약화시키지만, 동시에 데이터·기술 기반 혁신의 기회를 열어준다. 본 칼럼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심층 분석하며, 한국 상업은행의 대응 방안을 모색한다.
예금 이탈 리스크: 수익 기반의 동요와 경제 파급
CBDC 도입의 가장 즉각적인 위협은 예금 이탈이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현금으로, 기존 은행 예금과 유사한 안전성과 편의성을 제공한다. 개인과 기업이 중앙은행의 디지털 지갑이나 계좌를 통해 자금을 직접 보유할 수 있게 되면, 은행 예금으로의 유입이 줄어든다. 특히 이자 지급형 CBDC가 도입될 경우,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연동으로 은행 요구불 예금금리보다 매력적인 수익률을 제시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은행의 대출 원천 자금 조달을 위태롭게 하며, 예대마진(예금-대출 금리 차이) 축소로 이어진다.
실증적 증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중국 e-CNY 시범에서 일부 예금 유출이 관찰됐으며, 이는 은행 대출 공급 감소와 은행 실패 리스크 증가로 연결됐다. 한국의 경우, 2025년 상반기 한국은행의 CBDC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예금 10% 유출 시 은행 수익률이 15% 하락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리스크의 연쇄 효과다. 예금 이탈로 조달금리가 상승하면 대출금리도 따라 오르며,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증가해 투자·생산이 위축된다. 결과적으로 금융중개 기능이 약화되고, 경제 전체의 유동성 부족이 초래될 수 있다.
은행들은 이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방어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첫째, 금리 경쟁력 강화다. 단기 예금에 프리미엄 이자를 부여하거나, CBDC와 연동된 하이브리드 예금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BDC 보유 시 은행 예금으로의 자동 이전 혜택을 제공하면 유출을 억제할 수 있다. 둘째, 고객 충성도 프로그램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예금 상품, 예를 들어 고령층 대상의 안정형 예금과 젊은 층의 투자 연계 예금을 차별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단기적 비용 증가를 동반하므로, 장기적으로는 디지털 전환을 통해 운영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예금 이탈은 은행의 '화폐 창출 과정'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적절한 규제(예: 예금 한도 설정)와 협력이 이를 완화할 전망이다.
지급결제 인프라 변화: 중개 역할의 축소와 경쟁 심화
CBDC는 지급결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든다. 기존에는 상업은행이 예금 기반으로 송금·결제 중개를 담당하며, 거래 수수료로 안정적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CBDC 네트워크는 중앙은행 주도의 실시간 총괄원장(RTGS) 시스템으로, P2P 송금이나 결제가 은행 개입 없이 즉시 처리된다. 이는 은행의 결제 인프라 중개 기능을 약화시키며,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한다.
글로벌 사례를 보면, ECB의 디지털 유로 설계에서 상업은행의 오프-렛저(off-ledger) 결제 역할이 축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에서도 한국은행의 CBDC 플랫폼이 도입되면, 카카오페이·네이버페이 같은 핀테크와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은행 결제 수수료 수입이 20-30%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게다가 블록체인 기반 CBDC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자동 결제(예: IoT 기기 간 거래)를 가능케 하여, 기존 은행의 레거시 시스템을 구시대적으로 만든다.
이 변화는 은행에 기회이기도 하다. 단순 중개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 부가가치 서비스로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결제 데이터를 활용한 AI 기반 사기 탐지나, 구독경제 연동 결제 솔루션 개발이다. 한국 상업은행들은 이미 KB국민은행의 '디지털 뱅킹 플랫폼'처럼 CBDC 호환 API를 구축 중으로, 중앙은행과의 협업을 통해 인프라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AML(자금세탁방지) 리스크가 커지므로, CBDC 디자인 단계에서 은행의 보안 모듈을 내장하는 'AML by design' 접근이 필수다. 결국 지급결제 인프라는 '은행 중심'에서 '플랫폼 중심'으로 이동하며, 은행은 생태계 파트너로 재편될 것이다.
은행의 새로운 생존 전략: 혁신과 협력의 균형
CBDC 환경에서 상업은행의 생존은 고부가가치 금융중개와 디지털 혁신에 달려 있다. 중앙은행은 화폐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므로, 복잡한 신용평가·위험관리·맞춤형 대출은 여전히 은행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CBDC를 활용한 '프로그램형 대출'—매출 데이터 연동으로 자동 상환 조정—은 은행의 데이터 분석력을 강조한다.
전략적으로는 세 가지 방향이 필요하다.
첫째, 하이브리드 모델 도입. CBDC와 은행 돈의 공존을 위한 '듀얼 레이어' 시스템으로, 예금 일부를 CBDC로 이전하되 은행의 투자 자문을 결합한다. 둘째, 기술 투자. 블록체인과 AI를 결합한 리스크 관리 플랫폼 개발로, CoVaR(조건부 부도확률) 같은 시스템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셋째, 규제·협력 강화. 한국은행과의 공동 플랫폼 구축, 핀테크와의 오픈 뱅킹 확대로 생태계를 확대한다. 2025년 BCMC 포럼에서 논의된 바처럼, CBDC는 '결제 인프라 실험'으로 은행의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
결론: 디지털 화폐 전환기의 승자 가리기
CBDC 도입은 상업은행에 예금 이탈과 인프라 변화라는 위기를 안기지만, 데이터·보안 기반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전환의 기회를 준다. 한국은행들은 고객 중심 혁신과 중앙은행 협력을 통해 금융 허브로 거듭나야 한다. 향후 10년은 경쟁과 보완의 복합 구조 속에서 패자와 승자를 가를 '디지털 화폐 전환기'가 될 것이다. 은행의 미래는 혁신성과 신뢰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