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LM AND BOO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서형 Feb 22. 2021

나는 코피를 흘리며 자랐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하루는 어렵게 허락을 받아 하굣길에 친구네 집에 갔다. 책가방이랑 신발주머니, 필통, 우산까지 한 세트로 된 것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네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 이층집인 것 보다 그 애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에 더 놀랐다. 이 집 전체가 자기네 것이라는 뜻이니까. 우리를 맞아 주신 분은 그 애 할머니셨다. 

“네가 소영이구나. 받아쓰기를 잘한다며?”

그런 말씀을 들었다. 집이 너무 넓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중에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서 그 애 발끝만 보며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에는 오로지 그 애만을 위한 침대와 책상이 있어서 나는 또 놀랐다. 그 사실을 들킬까 봐 아무 말이나 했다. 물론 들켰을 것이다. 그리고 곧 할머니가 간식을 ‘쟁반에 받쳐서’ 가지고 오셨다. 예쁘게 깎인 과일, 과자, 유리잔에 담긴 쥬스. TV에서는 본 것도 같지만 실제로는 경험한 적도, 한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이었다.

최선을 다해 의연하게 간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코피가 났기 때문이다. 원래도 걸핏하면 코피가 났는데 하필이면 그때 코피가 뚝뚝, 간식 쟁반 위로 떨어졌다. p.99

- 책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내가 살던 동네는 고만고만한 집안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친구네 집이 이층집이라는 사실에 놀랄 일이 없는 대신 어딜 놀러가도 정확히 같은 구조에 놀랐다. 가족이 사는 집은 다 그렇게 생긴 줄만 알고 자랐다. 

    저자와 공감한 지점은 '코피'였다. 유년 시절 나는 코피를 자주 흘렸다. 허겁지겁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던 기억이 많다. 친구와 다투다가도 시뻘건 피가 뚝뚝 쏟아졌고 (말싸움 뿐이었는데도),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다가도, 따뜻한 방에서 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다가도 그랬다. 하던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종종 자다가도 코피가 났는데, 그럴 때면 최대한 이불에 떨어지지 않게 코 아래에 손바닥을 받치고 화장실까지 걸어갔다. 코피가 멎길 기다리느라 잠을 설치는 바람에 다음 날을 비몽사몽한 채 보내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당시에 씩씩한 골목대장 이미지를 추구했다는데 있었다. 평소에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코피 한 방이면 서열이 뚝 떨어지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태권도장에서 새벽 운동을 하고, 저녁이면 줄넘기 줄을 열심히 넘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의원에도 가고 이비인후과에도 가보고, 연근을 끼니마다 먹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코피가 하도 자주 나서 아예 주머니에 콧구멍 사이즈로 말아 놓은 휴지를 넣어서 다녔다. 한 번은 두 시간이 넘도록 코피를 흘리며 놀다가 흐물흐물해진 적도 있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보건실까지 가서야 겨우 멎었다. 그렇게 코피를 계기로 당시 ‘터프걸’이란 별명은 반납하게 되었고, 나는 매사에 나서기를 포기하고 적당히 수그러든 삶을 살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처럼 어른이 되면서 코피를 흘리는 일은 적어졌다. 건조하거나 코에 충격을 받으면 코피가 날 때도 있었지만 빠르게 지혈을 할 줄도 알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적당히 농담을 할 줄도 알았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 중 저자의 코피 에피소드는 잊고 있던 수많은 당황스런 기억을 불러왔다. 원치 않은 타이밍이면 떨어지곤 했던 빨간 코피가 눈에 선했다.



Netflix Original <Stranger Things>

    인터뷰를 하다가 문득 상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어릴 때는 뭐든 나서서 하는 적극적인 아이였어요. 발표도, 책 읽는 것도, 반장도 다 제가 하고 싶었어요. 친구를 돕는 일도, 선생님을 돕는 일도 다 나서서 했어요. 그리고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나대는 일이 적어졌어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외향적인 아이들은 자라면서 소란 떨지 않는 법을 배우고, 내향적인 아이들은 할 말은 하는 법을 배워가며 결국 남들과 살기 적당한 사람이 되잖아요.’ 

    주먹을 들어 싸울 일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싸우다가 코피를 흘리면 피를 확인한 어린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상대는 의기양양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코피가 마치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요하단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싸울 일을 만들지 않았을 거다. 언제 코피를 흘릴 지 모르는 아이니까, 내 주먹이 더 세고 빨라도 피를 먼저 흘리는 건 내 쪽일 걸 알아서. 코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제멋대로인 아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아무데서나 잘난 척을 하고 미움을 사거나 망신살을 뻗쳤을 수도 있다. 거의 항상 목이 쉬어 있던 나는 들뜨는 마음을 조절할 줄 몰랐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코피가 흐르면 그때서야 가만히 한 쪽에 앉아 숨을 돌렸다. 

    

Netflix Original <Stranger Things> 


    건조한 날이면 밤에 자다가 코피를 흘리는 일이 많다. 그럴 때면 꼭 꿈 속의 나도 코피를 흘리곤 했다. 잘생긴 배우와 데이트를 하다가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건물 밖으로 탈출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또는 내가 사람이 아닐 때도 스멀스멀 콧물이 아닌 뭔가가 기어나오는 느낌이 꿈 속까지 찾아왔다. 콧물은 흘리면서 잠들 수 있었지만, 코피는 흐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그럴 수 없다. 잠이 호닥닥 달아난다. 오랜만에 코피가 쏟아져 잠이 깬 어느 밤, 아침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뒤늦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를 보기 시작했다. 

 

Netflix Original <Stranger Things> 


    <기묘한 이야기> 는 코피를 흘리는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사건을 이끌어 간다. 어린이 친구들은 머리를 맡대고 보드 게임을 하고, 비밀 단어로 속닥이고, 무전을 하고, 쪽지를 남긴다. 친구끼리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믿고 그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가며 우정을 쌓는다. 괴물이 남긴 흔적을 쫓아 사건을 해결하고, 집에 쳐들어온 나쁜 사람을 무찌르며, 머리를 써서 함정을 만든다.


Netflix Original <Stranger Things>


    주인공 일레븐, 줄여서 엘이라 불리는 그는 한 화에도 몇 번씩 코피를 흘린다. 엘은 원치 않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내내 비밀 연구실에서 이용을 당하다 탈출했다. 정신 세계를 오가고 염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엘이지만, 그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코피가 난다. 엘에게 코피를 흘린다는 건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그는 기꺼이 새 친구들과 동네 가족들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고 또 코피를 쏟는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엘의 코피는 걱정해야 한다거나 챙겨줘야 하는 대상이 아닌 듯 하다. 때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코피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코피를 흘리고 있어도 별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코피를 흘리는 게 그렇게 당황스럽지 않다. 때로는 <기묘한 이야기> 엘 처럼 소매로 쓱쓱 문지르고 말아 버리기도 한다. 나의 코피를 보고 어떤 영양제를 더 먹어야 한다거나, 무슨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걱정 섞인 조언을 하는 어른들도, 남의 속도 모르고 ‘나는 코피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데’ 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이제 대수롭지 않다. 그땐 정말 작았고, 코피를 왜 흘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남의 얘기를 받아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끔 코피가 나더라도 더 이상 아득하고 기괴하고 풀썩 쓰러질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성장을 말한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낙천적인 위로와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해맑게 건넨다. 어린이를 말하는 책과 드라마를 보며 나는 언제 코피가 날지 몰라 불안해 하던 어린 시절을 잘 지내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지겹게 코피를 흘린 덕에 지금 알게 되었다. 
 

Netflix Original <Stranger Things> 

‘그래,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슬프고. 

그리고 때로는… 놀랍고 

행복하다.

그래서 말인데 

계속 자라다오. 

내가 막지 못하게 해. 

실수하고, 거기서 배워. 

삶이 널 아프게 하면…

분명히 그럴 거거든. 

그 아픔을 기억해. 

아픔은 좋은 거야. 

동굴에서 나왔단 뜻이거든. 


And, yeah, sometimes it’s painful. 

Sometimes it’s sad. 

And sometimes…it’s surprising. 

Happy. 

So, you know what?

Keep on growing up, kid. 

Don’t let me stop you. 

Make mistakes, learn from ‘em

And when life hurts you, because it will, 

Remember the hurt. 

The hurt is good. 

It means you’re out of that cave.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놈의 워라밸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