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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30. 2024

나 기록 디깅하는 법

나 기록 디깅을 하다가 초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에 적힌 의견을 봤다. 


적극적이지 못함이 걱정스럽고, 급우관계가 염려스럽습니다.


처음엔 대충 보고 담임 선생님 의견이라고 생각하고는 “어떻게 아직 1학년밖에 안 된 애를 이렇게 편협하게 낙인찍을 수 있어? 진짜 선생님 자질이 없으셨네!” 하면서 화를 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보고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건 교사 의견이 아니라 학부모 의견이었다. 글씨체로는 엄마가 쓴건지 아빠가 쓴건지 알 수 없었다. 내 추측은 아빠다. 학부모 결재란에 아빠 이름이 있었고 엄마보다는 아빠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적극적이지 못함이 걱정스럽고 친구 관계가 염려스러운 애.



유치원에 다니던 때, 아빠의 날 기억이 떠오른다. 아빠의 날은 아빠들이 수업에 참관하는 1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행사였다. 오전에 유치원을 다녀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저녁에 같이 다시 유치원에 갔다. 그때는 아빠들이 아빠의 날에 연차도 못 쓰던 시절이었나보다.


아빠가 오기 전까지 그날의 주제였던 [동물]로 발표를 하기 위해 병아리 관찰 책을 펴고 내용을 달달 외웠다. 아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발표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발표 시간이 다가오자 배가 슬슬 아프고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친구들은 손을 번쩍 들고 이것저것 대답을 했는데 나는 땅바닥만 보고 아무것도 못했다.


집에 돌아온 아빠는 엄마한테 “왜 쟤는 발표도 한번 안해?” 물었다. 아빠는 왜 그걸 나한테 안 묻고 엄마한테 물어본 걸까. 


아마 아빠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내 모습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나보다. 늘상 침대에 누워 공상의 세계에 빠져있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거실에 있는 가족 공용 컴퓨터로 소설을 쓰거나 책을 읽는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아이. 친구들과 노는 것을 즐기지 않는 소극적인 아이.


30년 가까이 된 이 오래된 기록들을 펼쳐보게 된 건, 퇴사를 하고 내 일을 찾는 과정에서였다. 기록이라는 주제로 끝까지 가보겠다는 포부로 [기록으로 나를 찾고 키우고 알리는 나 기록 수집가] 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주었다. 


나 기록 수집을 주제로 여러 플랫폼에서 워크샵을 열기로 했고, 나 기록 수집의 첫 단계인 [기록으로 나를 찾기] 커리큘럼을 만들기 위해 일단 내 기록부터 파헤쳐보기로 한 거다.


내 뿌리는 뭘까. 내 근본, 본진, 정체성은 뭘까.


그걸 알아야 나를 기록으로 어떻게 키우고 알려야 할지 알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36년의 시간 속에 숨어있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장차 36살에 나 기록 수집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뛰쳐나온 아이답게 내가 수집해둔 기록은 꽤 방대했고, 시스템과 템플릿을 사랑하는 미래의 직장인답게 분류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록은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은 기록]이었나보다. 수북히 쌓인 상장과 성적통지표가 단 한 학기도 빠짐없이 수집되어 있었다. 반면 친구들과 같이 덕질했던 밴드 클릭비 앨범이나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 스크랩북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을 수집하기보다는 멋지고 대단해보이는 기록을 수집하는 아이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긴장되어서 말도 잘 못하는 어린이가 속으로는 얼마나 인정과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걸까.


일기도 꾸준히 썼는데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중학교 1학년 때 썼던 일기장 두 권만이 있었다. 그 일기장에는 지금 내가 썼다고 해도 믿을만한 문장들이 있었다. 나는 그때도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이길 좋아하고 늦은 밤 혼자만의 공간에서 읽고 쓰는 것을 즐기는 아이었다.


2002~2003년의 일기  

- 내가 쓴 '학교 기물 파손 않기' 글짓기의 결과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내 속마음은 당연히 금상! 20,000원을 바라는 것이다. 좀 웃기지만 자신감도 갖고 있다.

- 새벽 1시다. 근데 나는 일기도 쓰고 또 낮에 문고에서 빌린 '천사가 된 비키'라는 책을 읽고, 마지막으로 내일 학원에서 볼 시험 준비도 해야 한다.

- 어제는 내 작품을 드라마 각본 공모전에 냈다. 거의 한 달 가량 고치고 쓰며 정성들여 썼는데 막상 내려 하니 자신이 없어졌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안 변했을까 싶다. 뭐, 물론 나도 변한 게 있긴 하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만의 공상 세계안에서 주로 살았는데 그래도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모습이 많이 사회화 되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입사원 시절, 워낙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과장님이 팀장님에게 잔뜩 깨지고 돌아왔는데 그걸 모르고 바로 업무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회사 수첩에 질문이나 보고할 게 있는 날은 시간대별로 과장님의 감정 상태를 기록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어떤 모습은 어렵게 바꾸었지만, 여전히 많은 모습들은 나인 채로 남았다. 살면서 타인과 환경의 영향을 받고 변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걸 확인하는 나 기록 발굴 작업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관계가 어려워서 혼자의 세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였잖아. 세상이 너무 궁금하고 사람들이랑 함께 어울리고 싶지만 어떻게 다가갈지 몰라서 열심히 공부하고 성과를 내서 인정 받는 것으로 눈에 띄고 싶었잖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서툰 모서리를 깎아내느라 엄청 고생 했겠네.


며칠 동안 초중고 12년간의 기록을 디깅하고 정리해봤다.



초중고 도합 상장 68개 중  

    가장 높은 비율인 26%가 글쓰기 상  

    그 다음 독서와 성적 우수상이 동일하게 18%씩 차지했고  

    미술과 만들기가 차례로 7%, 6% 였다.   


생활 통지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조용한 성격이며 자아 개념이 강하다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해력이 빠르고 성적이 우수하다  

    학습 의욕이 강하고 글짓기에 소질이 있으며 독서를 열심히 한다.  


인성검사와 진로 검사 결과

    진보적이고 반항적이다. 감정과 행동을 잘 통제한다.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감수성이 강하고 독창적이다.   

    예술적 창조와 표현, 변화와 다양성을 좋아하고 자유롭고 개성있는 활동을 좋아하지만 반복적 틀에 박힌 일이나 활동은 싫어한다.  


초중고의 기록을 살펴보면 나는 마음 속으로는 진보적이고 반항적이고 개성이 강하고 감수성과 독창성이 풍부했다. 자유롭고 개성있는 활동을 좋아하고 반복적이고 틀에 박힌 일이나 행동은 싫어했다. 그러나 그런 내 감정과 행동을 통제했다. 조용하게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나의 예술적 창조와 표현 욕구는 글쓰기와 독서, 만들기로 분출했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고 반항적인 면이 있었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친구들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빠르고 확실하게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릴적 일기장을 보면 유독 어릴 때 전학을 많이 다니던 탓에 친구를 사귀는 것을 오히려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던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전학을 많이 다니면 적응이 될 줄 알았는데 어린 나는 오히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점점 더 무섭다고 적었다.


나의 의지와 다르게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놓였고, 그때마다 나는 나를 증명해야 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되어 친구들은 끼리끼리 그룹을 이루었는데 그 틈바구니에 전학생인 내가 끼어들어갈 자리를 찾는다는 건 어린 나에게 너무 큰 압박감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혼자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다. 공부 잘하는 애는 혼자인 것도 나름 어울리니까.


책은 그런 나에게 가장 다정한 친구였다. 주로 에세이를 읽었는데, 작가와 내가 대화를 주고받는 기분이 들어서 외롭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와 교환일기를 주고 받으며 느꼈던 친근함을 느끼게 해줬다.


나는 사랑받기가 어려워서 인정받는 것을 택했나보다. 그게 더 빠르고 쉽고 명확한 길처럼 느껴졌을테니까. 나에게는 그게 성적이었다. 독서실 한 켠에 좋아하는 에세이를 숨겨두고 마음이 갑갑할 때마다 꺼내읽었다. 틀에 박힌 활동보다 자유롭고 개성있는 활동을 좋아하는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야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내가 받고 싶은 인정을 잘못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 높은 성적, 더 좋은 대학교, 더 높은 연봉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나 자체로도 너무 멋지고 대단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몰라서 너무나 먼 길을 돌아와야했다. 


나 기록을 디깅하며 답답하고 불안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나를 껴안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먼 길 돌아갈 필요가 없다. 잔뜩 겁먹고 움츠린 내 안의 어린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저 꼭 껴안아 주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충분해.


이 말이 진심으로 내 안의 어린 아이에게 닿을 때까지, 내 기록을 더 디깅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쯤 다음 단계로 넘어가보고 싶다.


모나고 약하지만 그마저도 충분한 내가 가진 반짝임을 찾으러.





이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들어 봤어요.

https://youtu.be/6pgow44R-Hw?si=AnBbqsrJaWnBDI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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