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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헌터의 커피 향 강의

커피 플레이버 휠의 이해

by 아레테 클래식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외식회사의 커피 생두 수입을 맡아왔다. 매해 수십 종의 생두를 계약하기 위해 커피 산지를 방문했고, 수많은 원산지의 커피를 시음하며 평가했었다. 커피는 산지마다 다른 기후와 토양의 영향으로 향미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고 다양하다. 처음에는 ‘균일한 품질’을 찾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결점이 적고, 로스팅 시 문제가 없는 안정된 생두. 그것이 내가 찾던 좋은 커피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나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 어떤 커피는 향만 맡아도 눈이 반짝 뜨이고, 첫 모금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묘하게 기억에 남는 커피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대개 ‘향이 아름다운 커피’였다. 가공 방식이 같고 등급도 유사하지만, 어떤 커피는 마치 과일을 갓 자른 듯한 신선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 커피들은 단순히 점수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함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한 물성 이상의 ‘감각의 데이터’를 쌓기 시작했다. 향, 여운, 입안의 잔향, 아로마의 넓이와 방향성까지.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다. 좋은 커피는 좋은 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향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연과 사람, 기술의 결합 속에서 의도된 결과물이다. 커피 생두를 수입하는 입장에서도 이제는 향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세 가지 시간의 층위


커피 플레이버 휠, 출처 SCAA


SCAA(Specialty Coffee Association of America)의 플레이버 휠을 보면 커피의 향미가 얼마나 복합적인지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이 다채로운 휠은 단순한 표가 아니다. 그것은 커피가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향을 갖게 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지도에 가깝다. 플레이버 휠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흥미로움과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나 많은 향들이 존재하고,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니.


우리는 흔히 커피를 한 입 마시고 “향긋하다”, “쓴맛이 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 느낌들은 각각 다른 시간대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성된 향이다. 커피 체리가 익을 때 생기는 향이 있고, 로스팅할 때 만들어지는 향이 있으며,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때 휘발되는 향도 있다. 즉, 커피의 향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정의 층을 따라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 향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반응이 등장한다. 바로 효소 반응(Enzymatic Reaction), 당의 갈변(Sugar Browning), 건식 증류(Dry Distillation)다. 이 세 가지는 각각 커피의 ‘밝은 향’, ‘달콤한 향’, ‘스모키 한 향’을 만들어낸다. 마치 음악의 구성처럼 서주, 본론, 종결에 해당하는 세 개의 맛의 시간축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세 반응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한 잔의 커피는 풍성한 향을 가지게 된다.


1. 효소 반응 – 커피의 꽃과 과일을 피우다


가장 먼저 소개할 향의 원천은 ‘효소 반응(Enzymatic Reaction)’이다. 이 반응은 커피가 아직 체리 상태일 때부터 시작된다. 특히 커피 체리가 잘 익고, 숙성된 상태에서 효소들이 자연 발효 과정 중 특정한 방향성의 향을 만들어낸다. 이 반응을 통해 탄생하는 향은 주로 꽃향기, 과일향, 풀향 등 밝고 생기 있는 톤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상큼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향이 바로 여기에서 온다.


예를 들어 에티오피아 내추럴 커피를 마셔보면 복숭아, 자두, 블루베리 같은 향이 폭발적으로 퍼진다. 이는 단순히 원산지 때문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커피 체리를 어떻게 발효시키고 건조하는지에 따른 결과다. 워시드 가공된 케냐 커피에서는 자몽 같은 선명한 산미와 향긋한 꽃향이 함께 피어난다.


이런 향들은 대개 라이트 로스트에서 가장 잘 표현되며, 섬세한 커핑 능력이 요구된다. 좋은 농장에서 온 생두는 이 효소 반응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그렇기에 생두를 고를 때부터 향을 맡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 반응을 ‘커피의 첫인상’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좋은 바디감이나 단맛이 있어도, 첫 향에서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커피는 기억에 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당의 갈변 – 구워진 단맛의 매력


커피를 볶기 시작하면 생두 안의 당분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바로 ‘메일라드 반응(Maillard Reaction)’이라 불리는 **당의 갈변 반응(Sugar Browning)**이다. 이 반응은 커피에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는 고소한 향, 캐러멜 향, 초콜릿 향, 견과류 향 등을 만들어낸다. 흔히 “달달한 커피”라고 할 때 이 영역의 향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브라질 커피를 예로 들면, 고소한 아몬드향과 밀크 초콜릿 같은 부드러운 단맛이 대표적이다. 콜롬비아 커피는 견과류 향과 캐러멜의 조화가 균형 있게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이런 향미는 로스팅에서 ‘미디엄’ 영역을 잘 활용할 때 극대화된다.


당의 갈변 반응은 ‘조리의 미학’이기도 하다. 생두를 단순히 가열하는 것이 아니라, 열을 조절하며 내부의 당과 단백질이 어우러지는 황금 지점을 찾는 것이다. 너무 빠르면 향이 얕고, 너무 느리면 탄맛으로 변질된다. 이 과정은 로스터의 기술과 감각이 집약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 단계의 향이 가장 익숙하다. 커피전문점에서 나는 따뜻하고 구수한 향, 카페 라떼 위에 올라오는 달콤한 뉘앙스 모두 이 반응의 결과다. 그리고 나는 이런 향을 ‘커피의 중력’이라고 표현한다. 누구나 끌리게 만드는 따뜻한 중심의 힘이기 때문이다.



3. 건식 증류 – 깊고 스모키 한 여운


마지막 향의 층은 건식 증류(Dry Distillation)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은 커피가 아주 고온의 열을 받을 때, 원두 속 섬유질이 분해되며 생성되는 향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향은 흔히 스모키 함, 나무 타는 향, 가죽, 향신료, 재, 심지어 숯에 가깝다.


이 향은 라이트나 미디엄 로스트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통 프렌치 로스트나 이탈리안 로스트 수준으로 강하게 볶을 때 두드러진다. 스타벅스 같은 대형 브랜드들이 추구하는 묵직한 다크 커피가 바로 이 향미를 중시한다.


건식 증류의 향은 때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커피에 깊은 여운과 무게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한 잔을 마신 후 입 안에 오래 남는 스파이시한 뒷맛, 가볍게 쓴 감칠맛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영역은 로스팅을 넘어서 ‘불’ 자체의 언어다. 커피가 불과 만나면서 타오르고, 그을리고, 스스로를 연기로 바꾸는 순간이다. 잘 다루면 향신료처럼 우아한 뉘앙스를 주지만, 과하면 그저 ‘탄 커피’로 끝나버린다. 그래서 이 향은 고급스럽고도 위험한 양날의 검이다. 하지만 적절히 다루면, 커피 한 잔의 마무리를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나가며: 향으로 커피를 기억한다는 것


커피의 향은 결코 하나의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커피나무가 자라는 토양, 수확 시기, 가공 방식, 로스팅 프로파일, 추출 방법, 그리고 음용 온도까지—모든 과정이 하나의 향을 향해 축적된다. 나는 생두를 수입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작을 목격하고, 그 결과를 감각으로 확인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생각한다. 커피 한 잔이 누군가의 아침을 깨우고, 어떤 이의 대화를 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위로를 건네는 그 순간까지도 모두 향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 향은 단지 냄새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며, 감정이며, 언어가 되지 못한 경험들이다.


앞으로도 나는 더 많은 커피를 맛볼 것이다. 더 많은 향을 구분하고, 더 많은 생두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커피의 본질은 언제나 ‘향’이라는 사실이다. 숫자와 기준 뒤에 숨은 감각의 세계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커피를 ‘음료’가 아닌 ‘경험’으로 마실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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