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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07. 2024

10 나로 존재할 용기

신곡_인페르노_제2곡 후반부_2

제목: 10 나로 존재할 용기

부제: 신곡_인페르노_제2곡 후반부_2


1. Read and Note Me


Dunque che è? perché, perché restai, perché tanta viltà nel core allette, perché ardire e franchezza non hai,(Inferno 2.121~123)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왜, 왜 머물렀는가? 왜 그런 비겁함이 당신의 마음을 유혹하는가? 왜 용기와 솔직함을 갖지 않는가?(지옥2.121~123)


나를 해하려는 사람들


2장 중반부의 내용을 보면 단테는 두려움 때문에 영광스런 신의 축복에 임하길 주저하고 있다. 오늘은 그의 비겁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와 우리는 왜 용기와 솔직함을 갖지 못하는지에 대해 묵상해볼 차례다.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기독교 이념을 창업 정신으로 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7시부터 팀별성경공부(GBS: Group Bilble Study) 혹은 개인성경묵상(QT: Quiet time)을 하는 것이 회사의 규칙이었다. 그 시간은 나를 마치 교회에라도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신입사원 시절 신에 대한 깊은 묵상, 삶에 대한 고민, 가족에 대한 염려와 감사의 일 등 일터의 ‘집사님’들이 들려주시는 감동적인 일상은 말 그대로 ‘거룩한 산제사’였다.


그러나 거룩한 아침 시간이 지나면 일상은 전쟁터로 돌아갔다. 사건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아침 일찍 해외에서 생산 투입 전 샘플(Pre-Production Sample:생산 투입 전 마지막 샘플) 이 도착했다. 열흘을 기다려 도착한 샘플은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피드백이었다. 디자인 실장이 나서서 이대로 진행할 수 없다며 크게 화냈다. 참고로 그녀는 나의 아침 QT모임 리더다.


이거 담당자 누구야?

시즌이 코 앞인데,

우리 사업 거덜 내려고 작정했어? 어?

다들 미친 거 아냐?

이거 전단광고 상품이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몰라? 전단광고?


사무실 사람 다 들으라는 것처럼 디자인 실장이 고함을 친다. 곧 지옥문 앞에서의 재판이 시작된다. 긴급회의다. 이례적으로 판이 커졌다. 대표이사, 전략기획실장, 상품기획자, 디자인 실장, 담당 디자이너, 소싱 MD 부서장, 담당 소싱 MD 이렇게 모였다. 전체 진행 상황부터 긴급히 체크했다. 핵심 제품에 대한 전사적 마케팅은 이미 준비가 완료된 상태다. 전단 시안이 확정되고, 광고를 위한 촬영이 시작되었다. 엎진 데 겹친 격으로 이번 제품들은 TV 광고로 대대적으로 노출될 예정이다. 그렇다 이번 제품에 들인 예산이 막대하다는 얘기다. 나아가 유통업의 모든 행사는 고객과의 약속이므로 납기를 어긴다는 것은 고객과의 약속을 어긴다는 뜻이 된다. 만약 제품 출시 예정 기간 안에 해당 제품이 입고되지 못하면 전국 점포에서 고객 클레임은 빗발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에 대한 화살은 내게로 돌아왔다. 디자인 실장은 나를 공격했다.



유대리, 샘플 작업지시서 제대로 발송하고 소통 정확하게 한 거 맞니?


너, 중국어도 잘 못하잖아. 영어로 소통하면 걔들이 이해는 허냐? 그걸 어떻게 확인해?


부서장님, 부하 직원 관리 안 하세요? 이거 다 의사소통 문제 아니냐고?


나도 그냥 당할 수 만은 없없다.


실장님, 작업지시서 제대로 발송한 게 맞습니다. 작업에 대한 내용도 꼼꼼하게 소통했고요. 제가 보기에는 PP 샘플이 작업지시서에 맞게 잘 수정돼서 온 것 같은데, 어떤 게 문제라는 거죠?


디자인 실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칼라가 아니잖아. 칼라가. 자기 눈 없어?”

“칼라에 노란 끼가 돌잖아. 이건 SS 핵심 상품인데, 따뜻한 느낌이 아니라. 쿨하고 프레시한 파랑계열이어야 해”


그 얘기를 듣고 난 상황 파악이 됐고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칼라의 문제를 지적했다는 것은 샘플의 다른 것에는 문제가 없다는 방증이었다. 하물며 이 제품은 블랙 칼라였다. 사실 검은색에도 다양한 색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량생산에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색도 차이는 감안할 수밖에 없다. 요즘 원단은 자동화 라인이라 편차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날씨, 기온, 습도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감안하는 게 업계의 상식이다. 특히나 검은색에 노란 색감 혹은 파란 색감을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최근에 디자인 실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없는지? 오늘 그녀는 왜 이렇게 일을 키운 것인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기분에 수치스러웠다. 무엇보다 일 자체가 아니라 나의 능력이나 성실성을 지적한 그녀가 너무 미웠다. ‘검은색에 노랑끼’,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졌다.


오늘의 재판장 역할이신 대표이사님의 의사결정은 매우 빨랐고 현명했다. 담당 MD와 디자이너는 지금 즉시 현장으로 가서 최종 샘플 컨펌하고, 디자이너가 현장에서 최종 결정해서 최대한 빨리 제품을 생산 투입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날 여벌의 옷은 고사하고, 속옷과 양말도 챙기지 못한 채 중국 현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에게 해외출장 간다는 말도 못 했다. 문제는 싱겁게 해결됐다. 현장에서 노랑끼 많다던 제품은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비극적이게도 그 제품은 입고 후 얼마되지 않아 완판 되었다.


Temer si dee di sole quelle cose c'hanno potenza di fare altrui male; de l'altre no, ché non son paurose.(Inferno 2:88~90)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됩니다, 그들은 무섭지 않으니까요.(지옥 2:88~90)


나는 오늘 읽은 제2곡의 중반부 즈음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됩니다, 그들은 무섭지 않으니까요.”라는 구절에 시선이 멈췄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산다. 우리는 나를 해하려 작정하고 덤벼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을 통해 나의 치부는 까발려지고 공론화되고 판단받는다. 이것만큼 아프고, 아찔한 순간이 또 있을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내게 화내고 있으며, 나는 왜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삶의 전쟁터에서 찾은 희망의 불씨


최근에 은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직접 쓰신 책을 선물 받았다. 그 책의 내용 중에 “남위에 군림하여 힘을 행사하려는 욕구가 정치 집단화되어 벌이는 주도권 싸움은 난장판이고 개그에 가까울 정도로 유치합니다. 인기를 얻고 남이 우러러 봐 주기를 위하여 행하는 사람의 가식과 허위의식은 사람의 추함을 폭로합니다.”이런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선생님은 정치적인 인간이 남위에 군림하기 위해 행사하려는 권력의지, 그것이 집단화되어 나타나는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나에게 모멸감을 주려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나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추악함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꼭대기의 정점에 이르라는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며 치열하게 경쟁해 왔다. 어쩌면 나를 공격하는 타인은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들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을 현시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런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내 삶을 유지하는 큰 동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욕망의 이빨은 나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야 내가 돋보인다. 뒤에서는 온갖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크기가 커져감에 따라 속도도 빨라져 갔다.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이런 욕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상대를 깎아내려야 내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당시 읽었던 책의 필사노트들>


이렇게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무렵 나는 ‘책 읽기’에 매달렸다. 삶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야 했다. 행복이라는 키워드의 책들을 고르고 골라한 권씩 읽어나갔다. 당시 몰입, 긍정심리학 등의 책들을 탐독했다. 마틴 셜리그만, 칙센트 미하이와 같이 미국긍정심리학회의 출범에 기여한 심리학자들의 책이었다.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긍정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보자는 이론들이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심리학적 연구가 너무 부정적인 현상에만 집중했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문제없이 진공 속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너무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례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록 우리 모두는 상처와 역경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와 방법론들을 찾아보는 것이 긍정심리학 분과의 발생 취지였다. 나는 당시 독서를 통해 긍정심리학의 균형을 잡으려는 새로운 시도를 확인하며 많은 위안을 얻었다.


나로 존재할 용기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인간 본성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더 고결한 삶을 그리워하는 세속적인 삶의 마음”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매우 모순적인 존재이다. 불멸의 삶을 꿈꾸지만 언제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고, 권력을 탐했으나 꼭대기에 올라가는 즉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우리는 무한히 변화할 수도 있으나, 자신의 한계 속에서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내가 되고 싶은 꿈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매여 있는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존재론적 가능성들이 우리에게 늘 불안을 야기시키지만 우리는 그것을 숙명으로 안고 덤덤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하다.


Quali fioretti dal notturno gelo chinati e chiusi, poi che 'l sol li 'mbianca, si drizzan tutti aperti in loro stelo: tal mi fec' io di mia virtude stanca, e tanto buono ardire al cor mi corse, ch'i' cominciai come persona franca:(Inferno.2.127~132)

혹한의 밤에 고개를 숙이고 오므라든 꽃들이, 태양이 빛난 후에, 줄기에서 모두 고개를 들고 피어나는 것처럼, 낙담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 자신을 되찾은 것처럼 말을 시작하려는, 용기가 생겼다. (지.2.127~132)


사실 불행 자체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해치려는 많은 상황 속에서도 나는 존재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모험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험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찾을 기회는 상실된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사람은 눈빛부터가 다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 그 다짐 속에서 나는 진정한 나로 존재할 용기를 갖는다. 혹한의 밤은 참으로 혹독하다. 새벽 서리에 온몸이 움츠려 들고 얼어 붙는다. 그러나 태양이 곧 떠오른다. 나는 이제 몸을 펴서 일어나야 한다. 그 따스한 온기가 내 맘의 불씨가 되어 용기를 북돋운다. 나는 이제 험한 여정을 떠날 것이다. 이제 결코 나를 잃어버리는 일 없이 무소의 뿔처럼 오롯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2. Rememb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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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도서


The Devine Comedy by Dante_Inferno, Dante Alighieri, the classic

La Divina commedia, Inferno, Dante Alighieri

단테 신곡 연구, 박상진, 대위학술총서

신곡 지옥(인페르노),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

일리아스,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아이네이아스, 베르길리우스(천병희 역), 숲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강성위 역),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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