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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07. 2024

11. 욕망과 좌절을 넘어 저 별을 향하여

신곡_인페르노_제3곡 도입

11. 욕망과 좌절을 넘어 저 별을 향하여

신곡_인페르노_제3곡 도입


1.   Read and Note Me


1.1   빛이 없는 세계로의 여행(오뒷세우스의 모험)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나를 통해 고통의 도시로 들어간다.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나를 통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간다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나를 통해 저주받은 영혼들 사이로 들어간다.

<Inferno3:1~3, 지옥 제3곡:1~3행>


제2곡에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단테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는 존재는 성 루치아였다. 그녀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을 밝혀 진리를 보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신곡에서 진리, 별, 하나님 등으로 상징되는 의를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를 천국으로 이끈다.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 진리가 가리워진 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단테는 지옥을 빛이 사라진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지옥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완전 암흑은 아니다. 이곳은 색채가 사라진 무채색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진실과 진리가 가리워진 이곳에서 많은 영혼들은 영원히 저주받을 운명에 처해졌다. 신의 진리는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다. 창조주는 전능하신 능력과 더 할 수 없는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통치에 늘 의문을 갖고 도전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불의로 인해 천국의 복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신의 빛은 가리워진다. 인간은 절망했고 드디어 지옥의 문은 열린다.


그리스의 시성 호로메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오뒷세이아는 빛이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전형이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빛이 없는 절망은 곧 바다로 분노로 변주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오뒷세우스가 싫다. 포세이돈은 전쟁의 신 아폴론과 제우스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갖고 반정을 모의하다가 트로이로 쫓겨왔다. 마침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트로이 전쟁 당시 프리아모스의 아버지)은 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튼튼한 성벽을 쌓아달라고 부탁했다. 트로이성은 이 두 신이 쌓은 성벽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트로이를 정공법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그리스 진영이 오뒷세우스의 비갑한 지략(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함락시킨 것은 썩 마음 내키지않는 일이었다. 포세이돈에게 오뒷세우스는 잔머리나 굴리는 극악무도하고 불의한 인간 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록 오뒷세우스는 승전했고 ‘도시의 파괴자’라는 명예를 얻었으나, 포세이돈은 그를 호락호락하게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바다는 오뒷세우스의 편이 아니다. 바다의 공포는 이제 무시 무시한 폭풍으로, 인간을 산채로 뜯어먹는 괴물로, 유혹하여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림프로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험은 끊이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이단적 욕망을 부추긴다. 인간은 저 망망대해의 항해를 지속한다. 긴 항해 속에서 난파할 수도 있고 조난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섬에서는 환대를 모르는 외눈박이 퀴클롭스들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그는 무수히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이 여행을 계속 지속해야 되는가? 귀향을 중단하고 다시 ‘도시의 파괴자’가 되어 새로운 제국의 제왕으로 우뚝 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뱃머리를 되돌리지 않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모험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이다. 그는 빛이 사라진 곳에서도 또 다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1-2. 젊은이의 절망 그리고 죽음에의 의지(타나토스)


나에게도 그런 방황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청소년기에 절대적인 지식을 동경했었다.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학부에 진학하고 쉬는 시간에는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탐닉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기개발서, 역사, 철학, 심리학, 정치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사와 교회사, 성서비평 등은 단연 내가 좋아했던 책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 속에서 고대, 중세, 근현대를 아우르는 반역의 역사를 보았다. 특히, 기독교회사에서 저질러진 잔인 무도한 교회의 폭압에 분노했다. 또한 당시 내게 절대진리였던 성경이 진리의 보고가 아니라, 여러 전승들이 조합되고 역사적 개연성을 가진 일종의 신화라는 연구에 충격받았다. 이것은 당시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내가 의문시하던 많은 질문들이 교회에서 쉬쉬하는 민감한 문제들이었던 것을 몰랐다. 이런 저런 질문들로 교회에서의 배제와 핍박은 견딜만했다. 그것은 눈치 없고 사회성 부족한 내가 겪어야 할 당연한 통과의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목숨처럼 믿어왔던 절대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그 후로 자주 죽음을 고민했다. 그 죽음의 충동은 자주 나를 어둡고, 음침한 숲으로 끌고 갔다. 나의 성향 때문일까? 나는 도서관에 있는 많은 죽음의 책들을 읽으며 고민했다. 특히 당시에 정신분석학적 설명 중 프로이트의 죽음의 의지(타나토스)에 대한 글을 탐닉했다. 타나토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적 모티브를 삶에의 의지(에로스)에 반하는 분노와 파멸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개인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억압되면 강렬한 분노와 파괴의 감정을 유발하는데 그로 인해 죽음 충동이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에의 의지(에로스)라는 또 다른 균형자가 가족, 인종, 민족, 국가의 커다란 매개를 통해 인간을 든든히 결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타나토스는 그렇게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나 보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의 신, 타나토스는 위계상으로는 다른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개념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형상화한 신이기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문제 인간 시지포스를 잡아 저승으로 보내러 갔다가 거꾸로 시지포스의 포로가 되어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구조되는 코미디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또한 아드메토스와 아폴론의 계약 때문에 알케스티스의 생명을 거두러 갔을 때도, 마침 아드메토스의 손님이었던 헤라클레스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기도 한 불쌍한 신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타나토스를 우습게 본 인간 영웅들은 나중에 큰 형벌을 받게 된다. 신(神)들은 시지포스에게 끊임없이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큰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최후는 그리스 신화 영웅들의 서사 중에서도 매우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정벌하고 활쏘기 대회에서 공주 이올레를 데려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질투에 눈이 먼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의 속옷에 히드라 독이 섞인 네소스의 피를 발라 시종 리카스에게 심부름 보낸다. 헤라클레스는 시종이 건네준 속옷을 입자마자, 전신이 불에 타는듯한 고통을 느꼈으며 옷을 가져온 시종을 집어던져 죽이고, 속옷을 벗으려 했으나 옷이 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자신의 살까지 함께 뜯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헤라클레스를 본 데이아네이라는 충격을 받고 자살을 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불사여서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조롱하며 기세 등등했던 시지포스도, 헤라클레스도 고통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고 있다. 이것이 신의 뜻을 어긴 인간이 겪어야할 큰 고통인 것이다. 필멸하는 인간은 죽지도 않고 영원한 형벌을 수행한다.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억겁의 형벌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1-3. 욕망과 좌절을 넘어 저 별을 향하여


어둠 속에서 지치고 힘든 나날을 살아가는 나그네에게 별은 작은 위안이 되어 준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인간은 원래 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인류는 단 한 번도 태양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인간들은 제우스의 빛에 불타버린 시밀레의 태아인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며 부활을 꿈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옛적 선지자들도 신을 두려워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모세마저도 신을 만나면 자신이 불타 소멸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성경을 포함한 고대의 많은 전승들에서 인간이 신을 만나는 방법이 주로 꿈이나 환상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 학문의 근본이었다.


오늘 나는 오뒷세우스의 욕망, 즉 단순하게 내가 알고 싶고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 베르길리우스 이상(타인을 살리는)에 도달하는 여정 위에 섰다. 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를 나일강에 띄웠던 소박한 갈대 바구니의 이상이다. 문화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오로지 인간구원의 꿈을 꾸었던 단테는 피렌체로부터 귀향 제의를 받자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어디에 있건 나는 태양과 별빛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불명예스럽게 아니 치욕적으로 국민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 그 어디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내게는 빵조차 부족함이 없다”


요즘 단테의 지옥을 묵상하며 절망의 늪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많은 인간들의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본다. 어두움은 여전히 두렵지만 우리는 빛 가운데로 행진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문학을, 철학을, 역사를, 정치를 그리고 무수한 사회의 현상들을 읽고 써야 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한나 아렌트는 2차 대전 전범인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나쁜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 악의 평범함이라 자조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녀가 악을 평범하고 얘기함으로써 악은 보편적 범주로 수렴되는 듯 했다. 그러나 악은 결코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악은 우리 주변에서 자라나는 잡초와도 같다. 잡초는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그것을 방치하면 커다란 숲을 이룬다. 우리는 잡초 같은 악의 뿌리 하나 하나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결코  많이 고민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니까'하면서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평범하게
살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평범함을 넘어서 선한 행동으로 하나하나 한땀한땀 악화에 대항해야 한다. 그 실천만이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둠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둠이 두렵다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문학을 통해 지향하는 아레테(atete, 그리스어로 탁월함이란 의미)의 정신이다.  


이것은 또한 어제 심야독서살롱 아챕토에서 읽었던 <낯선 기억들>에서 저자가 나에게 가르쳐준 카프카의 이상과도 이어진다.  그는 비록 사회 속에서 성공을 구가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사회의 변방에서 인간세계를 조명하고 통찰했던 작가였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보는 눈을 가졌다. 다르게 생각했고,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고뇌하고 절망했던 인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감옥 같은 현실의 이면의 깊이를 숙고했다. 그는 독신이었으며, 채식주의자였고, 자연요법을 좋아했으며 고행적이고 명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진정성 있는 작가였다.


우리에게는 저들이 희망인 것이고,
저들에게는 우리가 희망인 것이지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배움으로 벼려진 나의 붓끝은 타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을 지시하고 있다. 현실은 여전히 낯설고 부조리하고 괴상하기기 까지 하지만 오늘 나의 글이 평범한 사람들을 '순수의 세계'로 고양시킬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요즘은 정말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내가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해.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결국 우리를 살려낼 것이다. 탐욕과 탐닉을 넘어, 꿈과 이상과 상상이 서로 아름답게 노래할 그날까지, 나와 우리는 빛 가운데로 걸어갈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2.   Rememb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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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도서

The Devine Comedy by Dante_Inferno, Dante Alighieri, the classic

La Divina commedia, Inferno, Dante Alighieri

낯선 기억들, 김진영, 한겨례 출판사

단테 신곡 연구, 박상진, 대위학술총서

신곡 지옥(인페르노),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

일리아스,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아이네이아스, 베르길리우스(천병희 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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