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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07. 2024

12. 희망이 사라진 곳

신곡_인페르노_제3곡 43행 까지

12. 희망이 사라진 곳

신곡_인페르노_제3곡 43행 까지


1. Read and Note Me


1-1. 지옥. 희망이 사라진 곳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o duro.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inferno 3: 7~9)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만 있으니 나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여기로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 3: 7~9)


나는 요즘 단테의 지옥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이미 단테 신곡의 지옥편을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글쓰기는 더디기만 하다. 왜 그런 것일까? 처음에는 내 지식이 짧아 그런가 싶어 여러 해설서들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의 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만한 해석서는 아직 찾지 못했다. 미국 하버드 도서관에는 단테 신곡에 관한 단행본만 1만2천 권이 넘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는 원서나 괜찮은 번역서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해설서는 말해 무엇하나? 대부분의 해설서들은 모두가 약속하기라도 한 듯 비슷한 작품에 대한 배경이나 학문적 의의만 다루고 있다. 정작 본문 자체에 대한 강해나 깊은 통찰을 해본 흔적이 있는 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이 아침에 힘들고 어렵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작품을 다시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단테가 되어 진짜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고 그 깊은 의미를 음미해 보고 싶다. 이 타는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이 나이에 다시 학교에 입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혹은 넘어서 이것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세상 잘못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상념에 머리가 복잡해 진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온다. 그래 희망이다. 그리고 이 단어야말로 오늘 아침에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 꼭 필요한 단어인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지금 나는 지옥의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2. 희망이 없는 삶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o duro.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inferno 3:7~9)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만 있으니, 나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여기로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지옥 3:7~9)


단테는 9행에서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우뚝 솟은 지옥의 문은 한 인간에게 희망을 버릴 것을 강요한다.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배고픔, 혹한, 질병을 겪었던 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 모조리 사라진 것 같은 기분에 절망했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인생에서 그런 절망적인 심정을 크게 3번 정도 경험해 봤다. 먼저는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어린 시절이고, 두 번째는 목사고시생을 준비하던 시절에 간절히 원했던 신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장 초년 시절 원하지 않던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고서 고뇌할 때였던 것 같다. 이 모든 걸 글로 쓰자면 한도 끝도 없을 듯 하다. 이 지난한 이야기들은 언젠가 글로 다 풀어내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은 나를 두렵게 한다. 왜냐면 그 지옥은 태초부터 신의 창조 질서 안에 포함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창조자는 정의를 전능함과 지혜와 사랑으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지옥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니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려야 한다’고 단언한다. 단테는 지옥 문 위에 적힌 이 글을 보고 이것들의 의미가 끔찍하다며 몸서리친다.


1-3. 단테의 영원 VS 니체의 영원회귀


나는 이 대목에서 철학자 니체와 단테가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니체는 1881년 어느 여름 날 스위스 알프스의 작은 마을, 실스마리아의 실바플라나 호수를 산책하던 중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 앞에서 ‘영원회귀’ 사상의 영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영감을 바탕으로 약 1년 6개월 만에 자신의 대표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일필휘지로 완성했다. 나는 니체의 이 책이 단테의 신곡, 혹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더불어 위대한 서사시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러면 니체의 주요 사상 중 하나인 영원회귀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만약 어느 날 낮, 혹은 밤에 당신이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고 있을 때, 악마가 조용히 다가와 이런 말을 전한다면 어떨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끝없이 반복해서.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 모든 생각과 한숨, 네 삶에서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반드시 네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은 차례, 똑같은 순서로. •••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계속 뒤집히고, 모래 알갱인 너도 같이 뒤집힐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오늘 니체의 영원회귀가 악마의 영원한 고통에 대한 선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고 싶었다. 이것은 단테가 지옥문에서 보았다던 문구와 매우 닮아있지 않은가? 그러나 단테의 지옥과 니체의 영원회귀는 둘 다 무섭고 괴롭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양과 질이라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먼저, 단테의 시간 개념을 살펴보자. 단테는 1300년경 그러니까 중세 후반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시간은 매우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이었다.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인간은 태양과 달의 운행을 통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세계를 질서 정연하게 만든 절대자의 조화로운 능력이자 권능을 상장하는 것이었다. 단테는 지옥을 빛이 사라진 공간으로 묘사한다. 빛이 사라진다는 말은 시간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뜻은 더 이상 창조자의 섭리와 은총을 파악할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신과의 절대적인 단절 속에서 인간은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지옥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무지의 시간이다. 영원히 지속되지만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심연 속에서 인간은 절망한다.


반대로 니체는 시간을 질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지금 여기라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놓여있다. 니체가 주목한 시간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니체는 가장 고독한 시간에,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영원히 반복하는 할 거라는 환상인 것이다. 악마는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살게 될 거라고 유혹한다. 새로운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측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이 삶은 좋고 나쁨에 대한 경계도 사라진다. 모든 고통, 즐거움, 생각, 한숨, 관계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람쥐 챗바퀴처럼 영원히 반복되고 그대로 돌아온다. 이것은 우리가 언젠가 죽을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죽음이라는 일회적이고 필연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현재를 더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겠다는 감상에 젖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회귀는 무게가 훨씬 무겁다. 오늘의 작은 선택들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 그 생각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감상적일 수 없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영웅 시지포스가 신의 저주를 받아 억겁의 시간 동안 무거운 바위를 반복해서 산 꼭대기로 들어 올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을 수행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그게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무게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단테의 양적인 시간과 다르다. 이 모든 무게는 운명이 나에게 떠맡긴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고통, 즐거움, 생각, 한숨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이다. 단테가 바라본 절대적 시간이든, 니체의 창의적인 원형적 시간이든 무겁고 괴로운 것은 피차 일반이다. 지옥은 단테에게 희망을 내려놓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1-4. 천국에도 지옥 사이에 걸쳐져 있는 사람들


Ed elli a me: 'Questo misero modo tegnon l'anime triste di coloro che visser sanza 'nfamia e sanza lodo. Mischiate sono a quel cattivo coro de li angeli che non furon ribelli né fur fedeli a Dio, ma per sé fuoro. Caccianli i ciel per non esser men belli, né lo profondo inferno li riceve, ch'alcuna gloria i rei avrebber d'elli.' (inferno 3: 34~43)


그들은 대답했다. 이것은 수치와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이 비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은,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했던 그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와 섞여 있다. 하늘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쫓아내었다. 그런 깊은 지옥조차도 그들을 거두지 않으니 지옥의 망령들이 그들의 존재를 보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지옥 3: 34~43, 펭귄클래식 번역)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참한 길은 악명도 칭찬도 없이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영혼을 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신실하지도 않고, 자기 밖에 있는 악한 천사들의 합창단과 섞여 있다. 하늘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하려고 그들을 쫓아내며 깊은 음부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악인들이 그들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함이니라'(지옥 3: 34~43, 저자 직역)


<*위 본문은 원래 펭귄클래식 번역을 참고했는데, 너무 의미가 와 닿지 않아 내가 직접 번역해봤다. 단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최대한 직역하려 노력했다.>


드디어 나는 제3곡에서 천국에도 지옥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악한 일도 칭찬 받을 일도 하지 않고 살았던 슬픈 영혼들이다. 그들은 신에게 반역한 적도 없다. 본문에서는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저들은 생전에 신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자들이기에 신에게 반항하거나 복종할 기회도 얻지 못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하늘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저들을 지옥으로 쫓아 보냈으나, 음부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면 그들의 지위가 지옥의 영혼들에게도 어떤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옥의 영광(하늘의 영광과는 반대의 의미)은 지옥 그 자체의 특성에 부합하는 끔찍하고 악한 행위나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리라.


나는 기존 번역에서 그들이 자기만을 사랑했던 자들이라는 곳에서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나는 불과 어제 나 자신을 사랑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내 주변의 것들이 산산 조각나더라도 나신의 존재를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옥의 문 앞에서 단테는 자신을 사랑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있다며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전쟁과도 같은 삶 속에서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그런데 단테는 그 지휘통제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얘기하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제 나는 천국에도 지옥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간들 대해 좀더 얘기해 보고 싶다 .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명예도 수치 없는 인간들의 슬픈 이야기에 대해 좀 더 숙고해 보려 한다.


1-5.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슬피 울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슬픈지, 또 고통 받고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들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와 섞여 있다. 그 사악한 천사들은 신께 반항하거나,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고통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 그런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와 섞여 신의 사랑은 져버리고 자신만을 탐닉한 것이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에서 이런 문장이 있다. 영원히 나는 지속한다(Io etterna duro) , 이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희망을 문 밖에 남겨 두어라, 이 안에는 희망이 전혀 없다(lasciate ogni speranza)고 지옥문이 말한다.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니체의 ‘영원회귀적 상상력’에 기대어 이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 봤다.


나의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해 보자. 이제 나는 영원히 나만 존재할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외에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너의 밖에 남겨 두어라. 네 안에는 이제 아무런 새로움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떤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남아 있지 않는 너의 상태는 만족스러운가?


1-6. 그래도 희망


빛은 에너지이다. 빛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에너지를 잃은 것이다. 희망 없는 사람들, 단테는 그런 상태에 놓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 그들의 끔찍한 처지가 그를 두렵고 슬프게 했다.


죽음 앞에서 우리 육신은 무의미하다. 어떤 육체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죽은 이후에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도 사랑도 언제가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마지막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흐릿한 잔상으로 잊혀져 갈 것이다. 마침내 그들도 나처럼 잊혀질 존재이다. 때때로 죽음은 우리 모두를 빛 없는 파멸로 이끌어 가는 지옥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인간은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숙고하기도 한다. 만약 시한부 인생을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또 다른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또 다른 희망을 선물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이 수백, 수천, 수만 번씩 주어진다면 그들은 또 나태한 시계추 위에서 무기력해 하며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체는 영원회귀를 상상했을 지도 모른다. 삶을 비하하고 죽음을 찬양했던 무수한 허무주의자들에게 니체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라는 무게 앞에 극한으로 대비되는 지금 이순간의 무한한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억겁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면 우리는 지금의 모든 순간을 권태롭게 여기며 하찮게 살 것인가? 아니면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순간의 삶을 찬란한 기회로 바꾸려 노력하겠는가? 무한 반복이 어떤 힘과 방향을 가지고 극한으로 수렴된다면, 우리의 삶은 머지 않아 수직으로 가파르게 도약할 만큼의 힘과 속도를 갖은 3차 방정식의 포물선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희망을 잃어버린 채 고통 속에 울부짖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삶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야수에게서 폭언과 폭압에 고통 받고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삶의 의미를 잃고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포기할지를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비록 타의로 이 비참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그저 주어진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매 순간 삶은 우리에게 해결할 과제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이 의무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오늘도 축구 선수들은 힘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오늘도 등산가들은 목숨을 걸고 정상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은 삶의 힘든 과제를 더 의미 있게 해석하고 거기에 대답하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들이다.


지옥의 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 들어오려는 자
희망을 버릴 지어다”


희망을 버린 자들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 속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셰익스피어의 저 유명한 대사를 묵상하며 오늘 글을 마무리 하려 한다. 나는 아래 대사를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존재냐 비존재냐로 해석하는 편을 선호한다. 이것은 필멸하는 인간에게 죽느냐 사느냐를 질문하기 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이냐 아니냐를 숙고해 보는 것이 더 의미있는 해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독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지옥문 앞에서의 마지막 질문인 것이다 .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각주)위 명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명대사이다. 영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막 1장 햄릿과 오필리어가 만나기 직전, 클로디어스와 폴로니어스가 숨어서 햄릿을 지켜보고 있는동안 햄릿이 자신의 고뇌를 토로하는 장면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ie, to sleep,

No more; and by a sleep to say we end

The heart-ache and the thousand natural shocks

That flesh is heir to: 'tis a consummation

Devoutly to be wish'd. To die, to sleep;

To sleep, perchance to dream

ay, there's the rub.

For in that sleep of death what dreams may come,

When we have shuffled off this mortal coil,

Must give us pause—there's the respect

That makes calamity of so long life.

For who would bear the whips and scorns of time,

Th'oppressor's wrong, the proud man's contumely,

The pangs of dispriz'd love, the law's delay,

The insolence of office, and the spurns

That patient merit of th'unworthy takes,

When he himself might his quietus make

With a bare bodkin? Who would fardels bear,

To grunt and sweat under a weary life,

But that the dread of something after death,

The undiscovere'd country, from whose bourn

No traveller returns, puzzles the will,

And makes us rather bear those ills we have

Than fly to others that we know not of?

Thus conscience does make cowards of us all,

And thus the native hue of resolution

Is sicklied o'er with the pale cast of thought,

And enterprises of great pitch and moment

With this regard their currents turn awry

And lose the name of action.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격노한 운명의 화살과 물맷돌을

마음 속으로 견뎌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곤경의 바다에 맞서,

끝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죽는 것은, 잠드는 것,

그것 뿐. 잠으로 심장의 고통과 육신으로부터 지음 받은

천가지 천부적인 충동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 독실히도 바라던 것 아닌가.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그것이 곤란하구나!

죽음의 잠에서, 어떤 꿈이 올지 모르기에.

그것이 우리를 주저 하도록 하고, 그것 때문에

이 재앙의 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 사나운 채찍을 견디며, 권력자의 잘못과 세도가의 멸시,

경멸적인 사랑의 고통스러움과 끝없는 소송, 관리들의 오만

그리고 인내의 가치가 하찮은 자들에게 받는 멸시를,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참고 지내겠는가?

빼어 든 단검 한 자루면 스스로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데

그 누가 무거운 짐을 진채 지친 삶 속에서 땀을 흘릴 것인가?

죽음 뒤에 올 두려운 무언가,

경계에서 돌아온 여행자가 없는 발견되지 않는 나라가

의지를 교란시켜,

알 수도 없는 고난으로 가느니 차라리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견디게 한다면?

그렇게 깨달음이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리하여 결단의 생기 찬 빛깔은

사념의 창백한 기색으로 드리워지고

위대한 정점의 진취와 움직임도

이런 이유로 물길이 틀어져

행동이란 이름마저 잃는다.

<햄릿, 셰익스피어>


2. Remember Me

#셰익스피어#보호종료아동#20대청년여성의자살#죽음#희망#절망#가난#OECD자살율1위#엄마어렸을적에


3. 참고도서

The Devine Comedy by Dante_Inferno, Dante Alighieri, the classic

La Divina commedia, Inferno, Dante Alighieri

단테 신곡 연구, 박상진, 대위학술총서

신곡 지옥(인페르노),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

일리아스,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아이네이아스, 베르길리우스(천병희 역), 숲

햄릿, 셰익스피어, 바로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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