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신곡_고전을 읽는 이유
제목: 지적 자만심으로 책 읽지 마라
부제: 단테신곡_고전을 읽는 이유
1. 책을 좋아하던 아이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요즘 내 주변 지인들이 내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너는 뭐 때문에 그런 고리타분한 고전을 읽고 쓰고 있냐며 핀잔을 듣는 일도 다반사다. 술자리에서는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고 싶어 그런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도 듣는다. 이게 다 자만추(자기만족추구)라는 얘기다. 그들은 말은 한편으로 옳지만 한편으로 그르다. 나는 오늘 내가 고전을 읽고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때는 책이 귀하던 시절이다. 엄마가 세계명작전집세트를 사주셨는데 해저 2만리, 피터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글짐, 허클베리핀의 모험 등의 아동용 소설들이었다. 특히 모험 판타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우연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 어린 주인공은 기상천외한 모험을 경험하며 성장해 나갔다. 책을 다 읽으면 캄캄한 옷장 안으로 숨어들곤 했다. 나도 혹시 그들처럼 모험의 세계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짜릿한 기대 속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독서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여느 학생들처럼 입시 준비를 하느라 독서할 시간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늘 갈증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인생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신은 있는지? 신의 뜻은 무엇인지? 그래서 그때는 성경을 주로 읽었다. 성경은 신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구약과 신약의 영웅들, 선지자, 메시아를 보면서 또 다른 모험을 꿈꿔나갔는지도 모른다.
2. 절대지식에 대한 열망
IMF, 세기말의 글루미 한 분위기 속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정말 지식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었다. 나는 당시 전공인 심리학에 대해 진심이었다. 항상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교수님들이 주는 과제에 성실했고, 아무도 시키지도 관심도 없는 실험실 생활을 자처했다. 사실 실험실에서도 학부생을 받아주는 건 연구를 위함이 아니라, 소소한 잡일을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석사, 박사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다. 나는 마치 석사, 박사과정이라도 이수하는 것처럼 그들이 읽는 원서로 된 논문들, 실험설계의 방법론들, 난해한 고급 통계들을 탐닉했다. 당시 우리 랩에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으로 오신 연구원이 있었는데 나는 그분의 연구실에 가는 걸 좋아했었다. 그분 연구실은 내가 관리하던 실험용 흰쥐 사육장 바로 옆 이였기도 했지만, 외국인 특히 러시아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모스크바 국립대 전경>
당시 세르게이(?) 박사님은 심리학 원서 강독 강의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업 시간에는 대부분의 학우들이 미출석했다. 재미있게도 박사님은 한국어가 서툴러 출석을 부르지도 체크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출석이 인정되는 샘이었다. 그리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는 바람에 강의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 몇몇 학생들이 듣다가 졸다가를 반복했다. 대부분 친구들은 산들바람에 이끌려 놀러 나갔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박사님과 평소에 친분이 있었고, 사전에 텍스트를 잘 읽고 가면 부족한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강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강의가 끝나면 박사님이 자기 연구실에서 손수 만들어 주던 러시아식 커피 맛이 너무 좋았다. 그때 박사님과 보낸 시간 속에서 나는 유학의 꿈을 키워나갔다. 1755년에 세워졌고, 1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수많은 위대한 학자들을 배출했다던 그가 졸업한 학교가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3. 중앙도서관의 유령
도서관 귀신이라고 들어봤나? 나는 대학시절 별일 없으면 학교 중앙도서관의 인문학 쪽 열람실에서 보냈던 것 같다. 나는 도서관을 사랑했다. 마치 유령처럼 도서관 한 모퉁이에 나의 전용석이 있었다. 내가 궁금해한 많은 지식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 당시 내 독서는 이랬다. 어떤 내용에 궁금증이 생기면 그 주제어와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찾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문제를 고민하며 수많은 책들을 참고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어떤 주제도 관련된 책 10권 정도만 읽으면 정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독서는 나를 무한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 그것은 바로 사상사였다. 나는 당시 기독교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기독교 사상사에 대한 독서를 많이 했다. 그때 주로 읽었던 책들은 기독교 사상사, 기독교 교회사, 구약성경 연구, 이스라엘의 역사, 신약 성경 연구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 속에 빠지는 듯했다. 나는 분명 진리를 탐구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무수한 수수께끼들이 나를 둘러싸고 괴롭혔다. 기독교는 고대 근동의 민족종교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등 당시 대제국에 피지배 당하며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절대시 하던 성경도, 구약의 신도 결국은 그 지배와 피지배의 점철 속에 전승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개연성 있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접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성경의 많은 기술들이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성경 속의 많은 설화들이 고대근동의 유사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읽고, 믿고, 읽고, 동경하던 성경이 절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심지어 내 생애를 걸고 귀의하겠다던 나의 신념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것 같다. 일반인들이 알면 안 되는 비밀 조직(전통적 기독교)의 은밀한 비밀을 하나하나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로 인해 때때로 공격당했고, 고립당했으며, 외롭고 처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마침내 4학년 경 열심히 활동했던 기독동아리에서 나는 파문(?)당했다. 사실은 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나온 거 겠지만 그 당시 경험한 은밀한 따돌림과 언어폭력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민다. 그때 나의 고립감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변해갔다.
4. 3년의 군생활
“찌는 듯이 7월 초 여름 어느 아침, 형의 집에서 얹혀살던 한 청년은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충성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 글은 죄와 벌의 유명한 첫 문장을 패러디한 것이다. 2000년 7월 경북 영천에 있는 3 사관학교로 초급 장교 양성 교육을 위해 입교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좀비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죽음의 소용소로 끌려온 느낌이었다. 특히, 군인이 되는 교육 과정은 엄격하고 빈틈이 없이 돌아간다. 직각 보행에, 직각 식사, 바른걸음, 큰 걸음, 구보, 학과 수업, 야외 훈련 등 눈알 굴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책을 한 권 몰래 가져갔다. 그 책이 바로 ‘칸트의 역사철학’이다. 이상하다. 왜 이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니, 이런 문구에 줄을 쳐놨다.
<당시 읽던 칸트의 역사철학>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선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에 악에서 출발한다.”
그때 나는 불침번을 서거나, 행군을 하거나, 유격을 할 때 왜 이 책을 꺼내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을 보니 역사란 인간의 자유 의지가 나타난 현상이므로 자연의 출발과는 다르다는 게 요지인 것 같다. 아마 지리멸렬하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칸트의 철학이 나에게 어떤 목표를 알려주는 별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가서도 나의 책 읽기는 끊임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주로 읽었던 책들은 현대사, 공산당선언, 자본론 등과 같이 군대에서 금서로 지정한 책들이었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보안검토필 사인까지 받아가며 그런 책들을 탐독했다. 책은 시베리아와 같은 추운 동토에서 갖혀지냈던 나에게 3년 동안 가장 친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5. 자기 개발의 시대
내가 17년 이상 다녔던 회사는 독서경영에 진심인 회사였다. 오너는 지독한 독서광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 매년 연말 오너는 경영 화두를 주요 도서 몇 권을 필독서로 지목하고 전 직원은 그 책을 읽는다. 그 책은 다음 연도의 경영 목표나 프로젝트가 되고 전사적으로 일사불란 하게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경영계획을 작성했다. 나는 처음에 그런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책을 통해 많은 경영학적 이론과 실무를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다른 글에도 이렇게 썼었다. 독서경영은 당시 회사 운영의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오너는 매년 경영 화두를 필독서를 통해 소통했다. 그것은 시중의 많은 베스트셀러들 중 익숙한 문구들 ‘초격자’, ‘혁신’, ‘돌파’, ‘이기는 습관’, ‘시간 관리’ 등이다. 직장 생활 동안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그런 종류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독서 생활을 중단했다. 당시 읽었던 경영 관련 서적들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이 책이나 저 책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경영 관련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로는 어떤 새로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회사에서 강요한 필독서들과 경영 혹은 자기 계발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지엽적인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 좁은 방 안에서 발부 둥치고 노력하지만, 늘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에 한계를 체감하고 있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과 삶과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인생의 허무함은 더해갔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당시 나에게 삶은 인생은 끊임없이 욕망과 권태의 사이클이 돌아가는 시계추와 같았다. 삶의 권태와 더불어 나의 독서에 대한 열정도 시들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허망했던 것은 그 오랜 시간을 독서해 왔으나 내 손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모래사장의 모래를 움켜잡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과도 같은 허탈함 그것이 내 인생 독서의 중간 점검이었다. 많은 경영학 서적들은 그리고 자기 개발서들은 삶의 많은 노하우들을 얘기하는 듯했으나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내 갈증을 풀어주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6. 고전의 시대
나는 40대가 되어서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우연히 알게 된 온라인 소통 채널 클럽하우스를 통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고전 독서클럽 아레테 클럽장을 자임했고, 2년 넘게 고전을 강독하고 해설하는 삶을 살아왔다. 원래 책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고전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수한 자기 개발서들을 읽었다. 우연히 다큐멘터리에서 시카고 대학의 석학들을 탄생시켰다는 존 스튜어트 밀식 독서법을 알게 되었다. 그 계기로 3년간 '존 스튜어트 밀식 독서법' 을 바탕으로 고전 100권 읽기를 도전했고, 목표를 달성했다. 희한하게도 고전읽기 100권을 달성하고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미물같은 존재라는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그동안 나는 뭐하며 살아왔던 것인가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개발서, 경영 전략서, 미래 예견서, 투자 지침서 등을 읽으며 출세와 성공을 열망한다. 성공에 대한 해박한 논리도, 돈과 출세에 대한 노하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고전을 읽으면 좋은 리더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리더가 되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라는 논리에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사실 고전 읽기는 세속적 의미의 출세나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고전은 당장 눈앞에 닥친 어떤 문제나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쓰인 자기 개발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을 읽게 되면 성공과 출세를 위한 삶보다는 현명하고 바람직한 삶에 대한 풍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거꾸로 이런 지혜를 터득하게 되면 성공과 출세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몸부림이었는지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혜를 통해 성공과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 왜냐면 세상의 많은 처세는 역사와 고전에 비춰본 인문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게 설명하는 듯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 최근 경험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최근 연재 중인 죄와 벌에서 절대 지식의 추구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20대 초반 삶의 정답을 갈망했던 나를 다시 발견한다. 내가 절대자를 그토록 동경했던 것은 절대자 혹은 절대적 지식을 갖게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안도감 같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학년 때 기숙사 수용 인원 제한 때문에 기숙사에서 나가게 된 적이 있다. 그때는 생활이 어려워 당장 월세를 구할 보증금도 없었다. 감사하게도 출석하던 교회 지하실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하 생활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성 피로, 감기에 시달렸었다. 많이 우울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좁고 지저분한 자취방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햇볕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라는 공간은 악순환을 경험하게 했다. 지하는 어둡고 밀폐된 극한의 환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가 반응한다. 기관지 질환, 감기에 자주 걸린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피로감, 우울증이다. 삶의 의욕 저하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귀찮아진다. 가난한 삶과 처지에 대한 비관과 공포가 극에 달하면 절망의 늪에 빠진다. 심지어 죽음까지 생각하기 했다. 페테르부르크 뒷골목 작은 방에 살았던 가난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단순히 19세기에 살았던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고, 우리 시대의 슬픈 MZ들의 환영이다. 죄와 벌의 주제는 기존의 다른 그리스 비극, 레미제라블, 단테 신곡 등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이어진다.
이것만은 꼭 말하다 싶었다. 고전은 지적 자만심을 표출하기 위해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고전은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의 의미를 넘어선다. 대중적 인기라는 것은 지역, 시대, 분야마다 천차만별이다. 대중적 인기를 가진 사람이 쓴 책을 고전이라고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책은 대중적 인지도와 무관하게 이미 그 자체로 읽히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녔기에 누구라도 읽어봐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전은 시대와 시대를 초월해 서로 연결된 산맥이다. 시대마다 큰 산들이 있어왔다. 그 큰 산들은 시대적 유산을 물려받은 지층들이 쌓이고, 지표가 융기하고 침식하며, 서로 밀고 당기면서 일어난 큰 지형의 변화들이다. 그러하기에 고전은 단순히 폼으로 읽어서 누군가에게 아는 채 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지성사의 산맥 위에서, 겸손하게 봉우리 하나 정도를 정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
더군다는 이 독서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나, 자신의 지식 정도를 과시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단 한 권의 고전 읽기에서도 필패할 것임은 자명하다.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 모험은 비록 쉽지 않겠지만, 첫 발걸음을 내디딘 탐험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탐험의 높이와 깊이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고전 읽기도 그래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 깊이와 맛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런 경험 없이 독서를 하다가는 얼마 가지 못해 낙오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고 허무한 일이다. 그러나 고전의 깊고 높은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맛과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내 지인들은 반드시 고전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고전 읽기가 좋은 음식을 먹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좋은 책은 마음을 살찌우는 양식이다. 고전을 읽지 않고 산다는 것은 평생을 인스턴트식품으로 연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물론 평생을 라면만 먹고도 건강하게 천수를 누린 노인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천운을 달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영양이 잘 갖춰진 음식을 먹어야만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장에 고전은 큰 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고전을 읽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의 두뇌 발달, 정서적 안정, 도적적 관념을 가질 수는 있으나, 높은 가치를 이해한 교양인이라고 얘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의 끝에서 염증을 느꼈던 것처럼 많은 분들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요즘 판매되고 있는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실제로는 고전을 차용하고 심지어 표절하기까지 한 영양가 적은 인스턴트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고전은 상아탑 속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고전이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온 인간의 무늬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고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초월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도 믿는다. 무엇보다 나는 가난하고, 힘들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인문학 읽기를 지향한다. 고전 속에서 만나는 많은 주인공들은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많이 공감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내가 고전을 읽고 쓰고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이다. 아무쪼록 많은 이들이 고전을 읽는 지극한 복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7. 비범한 삶들을 살아라.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회상해볼까 한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웰튼 고등학교에 존 키팅 선생이 부임한다. 이 학교 출신이 키팅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를 세운 경험이 있다. 수업 시간에 엄격한 학교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책을 찢으라고 하거나,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기라(까르페 디엠)'와 같은 정신을 가르쳐주던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르침에 공감한 아이들은 사랑, 꿈 등을 고민하며 비밀리에 ‘죽은 시인의 사회’ 서클을 조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찰리 달튼이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학교는 발칵 뒤집히고 클럽의 정체는 밝혀진다.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닐 페리라는 학생은 키팅 선생의 가르침에 용기를 얻어 몰래 연극부에 들어간다. 그러나 공연날 아버지가 쳐들어와서 닐을 집으로 잡아끌고 가고, 당장 연극을 그만두라고 한다. 결국 그날 닐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닐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존 키팅 선생에게 책임을 전가시켰고 그는 결국 사임한다. 그를 대신해 교장 선생이 수업을 대신 맡는데, 수업 도중 키팅이 교실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 교실에 잠시 방문한다. 그러자 갑자기 토드 앤더슨이 일어나 책상 위로 올라가 휘트먼의 시 구절을 외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그 모습을 보고 다른 학생들도
책상 위에 올라가고 그 구절을 외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자기를 찾아가는 모험을 떠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세상이 원하는 것들 위해 입신하고 양명하는 그런 꿈을 내려놓고. 다시 오지 않을 현재를, 오늘을 붙잡는 비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는 읽고 쓰는 일은 글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모두가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경영자가 되고, 과학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것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시와 낭만과 진리와 사랑과 아름다움은 삶의 근간이고 목적이다. 나는 믿는다.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 고전들 속에 인간 삶의 지난한 피와 땀이 스며 있다고. 그 아름다움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큰 아이가 중 3 겨울방학 중임에도 선행학습 또 학원 숙제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침에 커피 한잔을 타줬다. 그 바쁜 와중에 마음의 양식이 될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나의 분신, 큰 아이에게 이 이단적이고 아름다운 죽은 시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Carpe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현재를 즐겨라. 오늘을 붙잡아, 아이들아. 비범한 삶들을 살아라.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야. 인류의 일원이기 대문에 시를 읽고 쓰는 거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같은 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지.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람은 삶의 목적이란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 속으로 갔다.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떨치고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살고 싶었다.
삶이 다했을 때 진정으로 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