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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30. 2024

(취미가 독서 6) 공부가 되는 독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6화. 공부가 되는 독서, 진작 이렇게 공부할 걸]



독서를 취미로 하다보면 독서의 지평이 넓어지는 걸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주로 읽으면서 취미로서의 독서 활동을 시작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장르가 변주를 타기 시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소설을 하나 읽었는데 그 작품에 혹 빠져 버렸다. 그렇게 한 작품에 매료되면 독서가는 작가를 찾게 된다.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이지? 하고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을 검색해본다. 그러다 그가 소설만 쓴 게 아니라 산문집을 내거나 시집을 낸 게 있으면 그가 쓴 산문은 어떤지 궁금하여 산문집을 읽어보게 된다. 이 작가가 시도 썼다고? 그러면 그가 쓴 시집도 사서 읽어보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작가의 작품 장르가 확장됨을 통해 함께 독서의 갈래를 넓힌다. 자연스럽게 에세이에 맛을 들이고 좋은 시를 읽게 된다.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출연하는 배우를 보고는 스토리나 후기 다른 사람의 평이 없어도, 이 작품은 무조건 볼 거야, 라고 선언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작가 작품은 이제 좋아하는 작가에 올려놓고 어떤 작품이 나오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독서의 지평이 넓어지고, 독서모임에도 참가하고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자신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영역의 책을 접하게 된다. 여럿이 같이 하나의 책을 정해 읽는 모임은 독서 까페나 네이버 밴드 같은 동아리 성격의 소모임이 있고, 돈을 내고 모임을 갖는 비즈니스 성격의 독서 모임도 있다. 어떤 모임이든 책을 읽는 모임에 소속된다면 기꺼이 그곳에서 정하는 책을 부지런히 따라 읽어가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번 달에 이런 책을 읽기로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고 그 때는 빠지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 독서의 성장은 없다. 물론 독서를 통해 반드시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독서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정서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지식적으로 성장을 하게 돕는다.



나 같은 경우는 단순히 재미로 읽기 시작한 소설로부터 가지가 계속 뻗어나가 역사, 과학, 자연, 환경, 사회, 우주, 양자역학, 철학 이런 식으로 접붙임이 되었다. 그리고 각 주제들은 가끔씩 그쪽으로 깊게 파고드는 또 다른 세밀한 가지로 뻗어나가 나만의 독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마치 개미집이 구불구불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과 비슷하다.


그러다가 든 생각이 이거였다.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공부를 이렇게 책을 읽듯이 재미있게 했다면 성적이 쑥쑥 올라갔을 텐데,



나는 수학을 제일 싫어했고 또 싫어한 만큼 못했다. 그리고 물리학이 어려웠다. F=ma 다음부터는 개념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니 개념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이것을 공식으로 바꾸고 공식을 무조건 암기해서 계산문제를 푸는 방식은 나에게는 마치 형틀에 매여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생물이란 과목도 이해를 하기보다는 무조건 암기해야 하는 과목이었고, 지구과학 역시 그랬다. 모든 게 암기, 암기였다. 기초를 이해하고 전개 과정을 이해하고, 그래서 이것이 이렇게  되고 저것은 저렇게 되었다 하는 느린 속도의 이해를 해야 하는 학생은 학과 수업을 따라잡기 어려운 학습 시스템 속에서 도태되어야 하는 열등 학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을 읽다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공부를 책을 읽으며 넓혀가기 시작했다. 근현대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말기, 임진왜란 등 호기심은 점점 커졌고 학교 역사 시간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만주 벌판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부모님들,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광복군을 준비하며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 서양문물이 밀려 들어오면서 벌어진 일들, 책에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많은 것에 대한 정보가, 지식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멀리 떨어진 헌책방에 가서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곳에서는 사기 힘든 "광복운동사" "대한제국사" "대한민국사" 같은 책을 사서 들여다 보았다. 그제야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에 대하여, 획일화된 암기 교육으로 덧입혀진 회칠한 무덤 같은 역사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과감히 잘못된 역사 껍데기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지금도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가령 우리나라 호랑이는 어떻게 멸종했는가, 같은 책,(호랑이가 없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할 때 호랑이 가죽은 일본 고국으로 돌아갈 때 가장 멋있는 선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포수를 이용해서 일본은 우리나라 호랑이 씨를 말렸다.) 우리나라 마지막 호랑이는 어디에서 발견되었는가. (1960년대에 대구 달서에서 발견된 호랑이가 마지막이라는 얘기가 있다.) 같은 미시적인 우리나라 이야기까지, 나의 호기심은 점점 깊어져간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성이 눈을 뜨자 전세계에서 벌어진 잔혹한 역사, 정의에 대한 쪽으로 시선이 넘어갔다. 미국의 인디언 멸망사를 다룬 "나를 운디니드에 묻어주오"를 비롯하여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 그리고 그 홀로코스트를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이 쓴 책, 쁘리모 레비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읽고, 인간이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 불평등과 정의, 사회의 차별에 대하여 책을 읽었다. 사진에는 없지만 쁘리모 레비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재일교포 또는 조총련계로 불리며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쓴 서경식 교수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국가의 정체성이 없는 사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인간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 인종이나 민족으로 구분하고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의 존중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가장 싫어했던 과목인 수학과 물리학, 그러나 이제 물리학이 사랑스러워졌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우주의 첫째날이 "빛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다. 태양은 성경에 따르면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이 생겨난다. 신학과 과학의 만남이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간격을 줄여보고자 시도했던 책을 통한 탐구는 지구의 시작, 우주의 시작, 태초의 기원에 대한 책으로 옮겨갔고 결국 물리학과 양자역학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리학을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다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학교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독서를 통한 공부가 더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우주의 탄생을 좇아가다 보면 다시 미시적인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들, 풀, 나무, 꽃, 열매, 새, 해양동물, 이들의 신비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을 관찰하고 추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북미의 새나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온갖 기괴하고도 놀라운 바다 생명체, 바이러스 같은 생명체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읽어가다보면 다시 동물에 대한 존중과 우리의 환경파괴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후손에게 안전하고 아름다운 지구 환경을 물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찾아보고 경각심을 일깨운다.



거시적인 우주의 탄생과 미시적인 지구의 생명체를 탐구하다 보면 마지막엔 다시 철학과 수학이 만난다. 지금은 그 놀라운 수의 비밀을 탐구해가는 책을 읽고 있다. "과학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신의 생각"이라는 책은 수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들은 우주의 비밀을 연구하다가 결론은 숫자가 우주 이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숫자가 가져다주는 놀라운 비밀은 책을 다 읽고 후기로 남겨볼 생각이다. 수학을 너무너무 싫어했던 나지만, 이제 내가 알 수 있는 수준에서만 책을 읽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은 오일러 공식이다.(그렇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만 안다. 오일러 공식으로 뭘 풀어볼 생각도 없고, 공식을 암기하지도 못한다. 그정도만 알아도 된다. 나에게는 과분한 지식이다.



봄이 되면 온갖 넝쿨 식물이 벽을 타고 가지를 뻗고 잎을 내고 꽃을 피워내며 공간을 점령한다. 벌써 살갈퀴들은 자기 자리도 없는 비좁은 틈에서 가지를 위로 올리며 잎을 뻗어내고 작은 꽃을 활짝 피워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한다. 지식의 벽을 타고 계속 넝쿨 가지를 이어나간다. 소설로 시작한 독서지만 이제 독서는 나의 호기심을 계속 부추기는 불쏘시개와 같다. 독서를 하게 되면 저절로 공부를 하게 된다. 지난 독서토론 모임에서 억지로 읽은 빌 브라이슨의 <바디>도 그렇고, 이번에 읽은 양자역학에 관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라면 읽기 힘든 책이지만 함께 읽으면 어떻게든 읽어진다. 그래서 독서도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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