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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23. 2024

(취미가 독서) 5. 책에는 등급이 없다

중2  독후감의 비극

[5화. 책에도 등급이 있다?  독후감의 비극]

누군가에게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일단 상대방은 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우선 한다. 그건 책이 주는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런 긍정성의 책을 읽는 사람 역시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라고 말할 때 알게 모르게 내게 주어지는 좋은 느낌이 있다. 물론 책도 잘 안 읽으면서 취미가 독서라고 해서 호감을 얻으려다가 "최근에 무슨 책을 읽으셨나요?" 라든지, 가장 감명 깊은 책은 무엇인가요?" 같은 기습 질문을 만나 당황해하는 모습으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거나 한참 동안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 짝퉁 독서가라는 사실은 금방 들통나고 만다.

독서가 취미입니다,라는 말에 상대방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오, 그러면 한 달에 몇 권 정도 읽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달에는 15권 내외를 평균적으로 읽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잠시 생각이 멈춘 듯 하다가 "아, 그러면 이틀에 한 권씩 읽는 꼴인데 그게 가능한가요?"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단하고 놀랍다는 탄성의 눈초리로 나를 다시 바라본다. 아마,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에는 하루에 한 권 정도는 가볍게 읽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해서 3년 동안 천 권을 읽었다고 신문기사에도 나고 책도 내고 강연도 하러 다니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런 분들에 비하면 매우 겸손하게 머리와 손을 조아려야 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매우 희귀하고 주변에서는 책을 일 년에 한 권 제대로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다시 쳐다본다. 세상 멸종 인간을 어디선가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대부분 상대방은 독서가 취미인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일단 성품이 좋고 고상하며 머리에 아는 것이 많고, 대체로 편견이 없고 타인을 위한 배려심이 깊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면 다음으로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라든지, 혹시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추천해주실 책이 있나요? 같은 큐레이션 영역으로 넘어간다. 뭔가를 추천해주어도 그것을 기록하거나 바로 인터넷으로 찾아서 주문하지도 않고 건성으로 들어넘길 것이 뻔한 시간 때우기용 질문이거나, 상대가 진짜 제대로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맞나 하는 것을 검증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상대방에 책을 추천해주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책에 대한 취향이 워낙 다양하고 책에 대한 시선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가끔은 책에 대한 자신만의 등급을 매기고, 이런 류의 책은 수준 낮은 사람이 보는 책이라는 편입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추천해주기에 앞서 꼭 어떤 장르의 책을 좋아하는지 물어본다. 소설을 좋아하는지, 에세이류를 좋아하는지, 철학이나 심리같은 인문서를 좋아하는지, 한국 작가를 좋아하는지, 외국 작가를 좋아하는지 꼼꼼하게 물어본다. 그래야 가장 적합한 책을 추천해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에이, 나는 자기계발류 책은 수준이 떨어져서 안 읽어요. 라든가, 추리소설은 시간 때우기용이죠 뭐, 올 여름에 읽을 시원한 책 없어요? 하면서 일부 종류의 책에 대해 편견 아니, 나름대로의 등급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요즘 시대에 독서 좀 한다는 사람은 두툼한 인문도서인 코스모스,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정도는 철인 3종 경기처럼 읽어줘야 어디에 껴서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철인 3종 도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가지고는 있는데 읽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중학교 2학년생이었을 때 한 독후감에 대한 에피소드를 잊지 못한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반에서 문예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책을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집에 책이란 물건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학교 도서관이 아니면 교과서 외의 다른 책을 읽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좋았고, 글을 쓰는 것이 좋아서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문예반이 바로 책도 읽고 글을 쓰는 곳이었다. 그렇게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나는 반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책을 많이 읽고 시를 잘 쓰는 아이로 통했다. 쉽게 말해 문학소년 정도 되었던 것이다. 부산시 교육감 주최 초등학생 시조 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했던 나는 어깨가 올라갔고, 내 작품이 실린 편액은 유리액자에 넣어져 몇 년 동안 교실 복도에 걸려 있었다. 내게 그것은 문학소년임을 증명해주는 훈장 같은 것이었고 친구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해주는 은유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중학교로 들어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쓴다는 아이들은 별로 없어서 (대부분 공부하거나 놀기에 바쁘다.) 내가 글을 조금 쓴다는 사실은 중학교 국어선생님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실습하러 나온 교생선생님들 사이에서 시 낭송을 잘하는 특별한 남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어 과목이 아닌데도 교생 선생님들이 우리 반에만 오면 나에게 시를 낭송해보라고 해서 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국어선생님이긴 했는데 나하고는 수업의 연이 닿지 않아 나는 한 번도 그 분의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국어선생님이 갑자기 우리 반에 찾아와서는 나를 불러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일까지 독후감 한 편을 작성해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여기서는 점잖게 나의 의사를 물어본 것처럼 표현했지만 사실은 내일까지 독후감 하나를 무조건 써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집엘 갔지만 갑자기 독후감을 쓰려고 하니 너무 막막했다.

오후 반나절만에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무리였다. 처음부터 한다고 대답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와 수업도 하지 않는 중학교 3학년 국어선생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서 교무실로 데려갔고, 나는 당연히 하루만에 독후감을 써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대해줬다는 그 상황에 나는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중학교에서 독후감을 쓸 수 있는 특별한 학생이라는 우쭐함이 나로 하여금 잠시 혼이 바깥으로 빠져 나가도록 만들었다.

당시에는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특별히 독서를 위한 책을 집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얼마 전에 읽은 애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 책을 찾아냈다. 아마도 <검은 고양이>였을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책은 집에 없어도 친구들끼리 빌려보는 셜록 홈즈나 애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 한두 권 정도는 다락방 구석에 굴러 다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 눈에 딱 들어온 책, 하지만 그 책은 일반 문학책이 아니라 추리소설이었다. 아마도 그림이 컬러로 들어간 그런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독후감인데 추리소설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조금 께림칙했다. 독후감인데 추리소설을 써간다는 것이 좀 그랬다. 뭔가 진정한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에는 그 책 말고는 독후감을 써 갈 재료가 없었다. 나는 혼자 낑낑 대며 추리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늦은 시간까지 200자 원고지에 작성했다.

다음날 그 중3을 맡고 있는 국어선생님이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고 나는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밤새 쓴 독후감을 들고 갔다. 교무실 문을 열고 조심조심 선생님 앞으로 간 나는 쭈볏거리는 발걸음으로 들고 온 원고지 뭉치를 내밀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애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고>란 제목을 읽은 선생님은 원고지 뒷장을 넘겨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허탈 웃음과 냉소를 지었다. 이런 맹랑한 녀석이 있나, 하는 그런 표정도 엿보였다. 감히 추리소설 같은 걸 독후감으로 써낸단 말이지 하는 비꼬는 표정도 얼핏 나타났다. 선생님은 길 가다 뭘 밟은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이 손짓으로 나를 향해 나가라고 내저었다. 나 역시 같은 걸 밟은 느낌이 들었다. 추리소설 같은 건 안 된다고 처음부터 말을 하던지, 아니면 무슨 종류의 책을 반드시 읽고 독후감을 써와야 된다고 못을 박던지, 그런 것도 한 마디 안 해주고는 추리소설 독후감을 써왔다고 읽어보지도 않고 쫓아내는 그런 행동은 선생님의 자질로는 매우 부적격한 것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그리고 반발심이 생겼다. 추리소설이 뭐 어때서. 왜 그런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가면 안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금도 그런 분위기는 독서 인구 저변에 독버섯처럼 남아 있다. 좀 어려워보이거나 난해한 책, 분량이 500쪽을 넘어가고 첫 장부터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 인문학적으로 깊은 고찰을 가지고 있어 소설 나부랑이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상한 책 정도는 읽어줘야 어디에 가서도 독서한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에세이는 뭐 한 시간이면 후딱 읽지 않나? 그런 책 읽으면서 취미를 독서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무협지를 읽는다고? 그것도 독서라고 할 수 있나? 어른인데 그림책을 읽는다고? 동화책, 만화책을 읽는다고 그건 더더욱 독서가 아니지 않나?

사람 앞에서 모든 독서는 평등하다. 사람 앞에서 책은 등급이 없다. 읽지 말아야 할 금서도 있어서는 안 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서, 대중소설이나 추리소설이어서, 판타니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이어서,가벼운 여행에세이라서 책 수준이 낮고 그런 책을 읽는 독자의 수준도 낮은 게 아니다.

독서는 취향이다. 책을 읽다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나온다. 어떤 사람은 소설 읽기가 힘들다고 하고 역사처럼 정보성 책이 좋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이야기가 아닌  책은 도저히 집중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러시아 책은 주인공 이름이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들다고 하고, 일본 소설은 주인공 이름들이 너무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다고도 한다. 젊어서는 자기계발류 책을 읽으면서 청춘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나이를 들면서 고전문학에 심취하는 경우도 많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자기 전공에 맞추어 필수적으로 관련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생활기록부에 적어야 합격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려운 책들도 곧잘 읽어내곤 한단다. 예전에 비하면 오히려 독서를 하기에는 더 나아진 환경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으나 읽는 사람에 따라 독이 되는 책이 있기는 하다. 나쁜 사상으로 사람을 세뇌시키는 책들도 있다. 물론 그런 기준도 상대성 법칙에 따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는 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독서가는 스스로 삼가 자신에게 맞는 책을 잘 고르는 안목과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독서가 고상한 취미라는 편견을 버리자.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것이나 같은 취미의 한 종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바치고 공을 들이는 것이 취미다. 그러니 어떤 책을 읽었다고 어깨 우쭐할 필요도 없고, 이런 책을 못 읽었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동일하게 우리는 어떤 책을 읽었느냐로 사람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자.

간혹 정말 엉터리 같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도 상대적이긴 마찬가지인데 모든 책은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는 독자를 우연처럼 만난다. 해리포터가 동화인가 소설인가, 순수문학 작품인가 판타지인가, 그런 걸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취미가 독서인 사람은 그냥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책을 가지고 등급을 만들지 말자. 서열이나 높고 낮음을 책으로 나누지 말고 그것으로 다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 나는 지하철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답게 보인다. 정말 그 앞에 가서 꾸벅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한민국에서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아름답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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