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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l 23. 2024

[취미가 독서] 18. 무협지도 독서 취미에 포함될까

[취미가 독서] 18. 무협지 읽기도 독서 취미에 포함될까?



독서가 취미인 김대리와 한부장의 대화를 살짝 엿들어보자.


'자네 취미가 뭔가?'

'네. 독서입니다.'

'책을 많이 읽나 보군. 취미로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면.'

'많이는 아닙니다만'

'그래, 무슨 책을 보나? 최근에 나온 책 한 권 추천해주게.'

'아, 그게. 저는 무협지를 주로 읽어서 부장님께 추천드리기가 좀...'


무협지를 주로 읽는다는 얘기를 들은 한부장도 당황했고, 책 추천을 요청받은 김대리도 당황했다. 보통 책읽기가 취미라고 하면, 인문서적이나 소설, 에세이 같은 문학서적을 읽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쉽게 요즘 무슨 책이 인기가 좋으냐, 최근 이런이런 책이 뜨고 있다는데, 너는 혹시 읽어봤느냐, 읽을만 하드냐, 뭐 이런 질문들이 오갈 수 있다.


그런데 생뚱맞게 무협지를 읽으면서, 당당하게 저는 독서가 취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보다 세분화시켜서, 저는 무협지 읽는 게 취미입니다,라고 따로 밝혀야 하는 걸까?


나는 중학생 시절에 무협지에 푹 빠졌었다. 한번 빠지고 나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무협지는 마치 늪과 같았다. 나를 무협지의 세계로 이끈 것은 친구따라 간 만화방 같은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집 책장이었다. 우리집 안방에 가로폭이 그리 넓지 않은 책장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책장에 나를 문학의 세계로 인도한 세계문학전집 30권 시리즈 세트와 이광수 전집 10권짜리가 있었다. 역사소설의 세계로 인도한 대원군 3권 짜리 소설이 있었고,  삼국지, 서유기, 수호지 같은 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제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히 고급스럽게 양장본으로 제본된 무협지 소설이 세트로 서너 질 꽂혀 있었다.


무협지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무협지에도 소고기 상품 등급처럼 질 높은 소설과 질 낮은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화방이나 책 대여점에 깔린 많은 무협지들은 질 낮은 소설류에 속했다. 어느 책이나 비슷한 유형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복수와 로맨스를 곁들인 19금 소설이 즐비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집에서 읽은 양장본 무협지는 정통 무협소설로 매우 고급진 문학 소설이었다. 나중에 무협지 세계를 졸업할 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협지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마치 어른이 되어 처음 술을 배우는 것으로 비유할 때, 친구들과 마구잡이로 술을 마시면서 배운 게 아니라, 아버지 같은 어른 앞에서 제대로 된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주도를 배우는 청년처럼, 정통 무협소설로 제대로 된 무협의 세계에 입문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난잡한 소설이 아니라, 정통 무협 문학 소설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다. 내가 무협지에 빠졌으면서도 질 낮은 소설을 알아보고 그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이유는 내 첫단추 무협지 세트 소설이 매우 심오한 수준의 문학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무협지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중학생 시절, 셜록 홈즈를 끝내고, 에드거 앨런 포를 끝내고, 이광수 전집을 끝내고, 대원군을 끝내고 들어간 세계가 '열려라 참깨'와 같은 광활한 무협 세계였다.


그 세계는 마치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어쩌면 영화 아바타에서 보는 그런 가상의 세계, 허공에 매달린 세계를 보는 듯했다. 적에게 부모를 잃고 혼자 버려졌다가 산 속에서 강호 제일의 무림 고수를 만나(그 사실을 모른 채) 강호 최고의 무술을 훈련하고 하산하여 천하제일검을 가지고 단 몇 초식 만에 적을 제압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순식간에 책 속 주인공이 되어 피를 흘리면서 적을 제압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과 같은 무술 실력을 휴지처럼 버리곤 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책이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어떤 것이든 한 줄 이상의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그 책이 정말 정말 정말 최악의 쓰레기 같은 책이고, 나쁜 사상을 주입시키는 의도적인 책이 아닌 이상, 작가의 창작에 의해 쓰여진 글이 모여진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작가의 사상과 글에는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어떤 한 줄의 문장이 당신의 삶을 바꿀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설령 무협지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 진정한 정의, 타인을 돕는 것과 같은 다양한 가치관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는 독자가 할 일이다. 그저 재미만을 찾고 시간만 죽이기 위해 책을 읽는다 쳐도 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니, 추리소설만 읽는다고 해서, 무협지를 주로 읽는다고 해서, 그림동화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신 취미는 독서가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독서라는 것은 책을 읽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안춘근의 <독서의 지식>에 따르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면 책이라 부를 수 있다.


1. 용이하게 운반될 수 있어야 한다.

2. 어떤 목적을 가진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한다.

3. 어느 정도의 분량이 일반적으로 등이라고 불리는 한 곳에 밀착되고 표지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독일 작가 파을 에른스트는 '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는 성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그는 결코 불행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지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데, 왜 그가 불행해야 된단 말인가?'라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여러분이여, 

그대는 행복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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