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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독서] 19. 버릴 수 없는 책이 있다

by 봄부신 날

[취미가 독서] 19. 버릴 수 없는 책이 있다



그동안 나를 거쳐간 책은 얼마나 될까? 무한대는 되지 않더라도 초등학생이 되어 글자를 익히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내 손과 눈을 지나, 뇌로 들어가고 다시 가슴으로 스며들어가 무의식 속에 또아리를 튼 책들은 눈대중으로만 해도 족히 만 권은 넘어가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25년 전 진해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책장 일곱 개에 달하는 책을 나눠주고 왔다. 전세든 자가든 살 집을 구하고 정착하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게는 늘어나는 것이 책이고 시디 음반이다. 음반은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이 많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거의 다 데리고 이사를 했다.



문제는 책이었다. 책은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을 집에 두지 않고 있었는데, 거실 양쪽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웠고, 베란다에도 책장 두어 개가 있어 책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사할 때마다 책은 어떻게든 처분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거실 벽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책을 둘 수밖에 없는데, 책은 매달 10권 가량씩은 신간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 달에 10권의 책을 산다면 1년이면 120권이 되고 5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면 기존 책 외에 추가로 600권의 책이 여기저기 짱박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겉으로는 한정된 책장밖에는 없는데 어떤 틈을 만들어서라도 책은 집어넣기 때문이다. 책장 앞에 이중으로, 책등 위 선반과의 공간에도 책은 꽉꽉 들어찬다.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있다. 죽을 때 안고 갈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이사할 때마다 힘들게 책을 다 가지고 가냐고 사람들이 말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사할 때마다 평균 책장 두세 개 이상 다섯 개 책장까지도 털어내고 간다. 이사할 때마다 책을 주변에 나누어 주지 않고 떠난 적이 없다. 이번에 이사를 올 때도 몇 번의 나눔을 했고, 그래도 안 되는 책은 교회 서가에 꽂아 놓았다.



이야기는 변하지 않지만 책은 변한다. 물리적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종이 질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재생 종이로 만든 책은 빨리 변색된다. 재생종이는 친환경을 추구하는 작가나 출판사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좋은 책은 좋은 종이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황대권 씨의 <야생초 편지> 같은 책은 재생종이로 만들어 환경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저자가 직접 교도소에서 그린 예쁜 꽃그림이 들어간 책이니만큼 보존 가치를 생각해서 양장본에 빤질빤질한 종이로 만들어 내놓았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책은 생각보다 수명이 길지 않다. 오래 두면 누렇게 변하고 손을 대지 않으면 삭는다. 만약 햇살이 잘 들어오는 곳에 서가를 두고 책이 광합성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책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죽은 나무여서 더 빨리 푸석푸석해질 뿐이다. 그래서 책은 이사할 때, 또는 이사를 하고 나서 책장을 정리할 때 책장에 꽂을 책과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책으로 분류한다. 이사하기 전까지 모인 책이 상당하기에 어느 장르를 가져가고 어느 장르 책을 빼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정말 어려운 시간이다.



그렇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절대로 고민하지 않는 책이 두 권 있다. 적어도 내가 책장을 관리하는 동안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는 그렇게 될 것이다. 유언장에 책 두 권의 이름을 적어놓을까도 생각 중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미지수다.



이번에 어머니가 50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다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어머니에게는 다 추억과 의미가 깃든 것이라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가지고 가신다고 한다. 어머니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기에 한숨을 쉬며 그냥 가져가자고 동생과 얘기를 했다. 이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자개 농이며 재봉틀 같은 것들은 그저 의미 가치만 가진 존재로 공간과 세월을 이동한다.



아마 내가 죽으면, 내 책과 음반들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은 뻔하다. 다행히 큰딸은 바이올린을 하고 있으니 음반을 맡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이번에 취직한 둘째는 책읽기에 조금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으니 책을 맡겨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하는 건 오롯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우리 자녀가 엄마 재봉틀을 물려 받지 않고 짐으로 생각한 것처럼, 스트리밍으로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전자 디바이스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초디지털 메타버스 시대에 무겁게 자리 차지하는 책이며 음반은 아날로그의 상징,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버릴 수 없는 책이 있다는 얘길 한다고 꺼낸 이야기가 길어졌다. 아무튼 다음 이사를 갈 때에도 또 많은 책을 주변에 나누어주고 가겠지만, 절대로 나눔을 할 수 없는 두 권의 책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30대에 어머니에게 선물한 시집, 조병화의 1955년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와 내가 헌책방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산 허영자의 1977년 시집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두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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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하신 아버지가 낡은 시집 위에 씌운 책보 위에 겁도 없이 내가 제목을 적었다.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단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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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 속지에 아버지가 적어 놓은 제목이다. 아버지의 친필을 여기서 만난다.)


나는 조병화 시인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이 시집에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시집의 첫 시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라는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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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주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받히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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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시인가.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무작정"이란 단어가 이처럼 격렬한 사랑의 단어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무 대책 없이 좋아하는 그 마음, 바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아닌가.

이 시집을 어머니에게 선물할 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했으리라.



허영자의 시집은 내가 헌책방에 가서 산 책인데, 1977년에 1,000원으로 발간된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앞에 다른 분에게 친필 사인을 하고 보낸 책이라 내게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비록 허영자 시인이 내게 사인본을 건넨 건 아니지만, 그의 친필 사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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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준 선생님이 누구일까 궁금하지만 알아낼 길은 없다.



[긴 봄날]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게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情婦)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내다본다

긴 봄날에-


(허영자, 긴 봄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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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랑캐꽃은 제비꽃을 가리킨다.

춘궁기 때 북쪽 오랑캐들이 넘어와 그나마 남은 식량을 빼앗아 갔다.

그때 제비꽃이 피어 있어 오랑캐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비꽃이 숨어 사는 정부를 닮았다.


긴 봄날, 역병과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의 싱싱한 내음이 난다.

막을 수 없다.


숨어 있는 사랑도

다 드러난다.


제비꽃도 활짝

제 몸 보라빛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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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이사를 가든, 내가 죽기 전에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시집 두 권 이야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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