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8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시집

by 봄부신 날 Mar 25. 2025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시집

한줄평 :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스며오르는 한 줄기 푸른 잎사귀 같은 시




브런치 글 이미지 1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새벽에 들은 노래, 일부, 13쪽)

노래하는 시인, 한강 노벨문학상 작가. 그녀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시인으로 먼저 등단하고 소설을 발표했다. 그녀가 시인으로 등단한 때는 1993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리고 스물 넷이 되던 1994년에 <여수의 사랑>으로 소설가로 나선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그녀의 시집을 438번째로 펴낸 때는 2013년으로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년이 온다>를 발표하기 한 해 전이었고, <채식주의자>를 발표한 2007년으로부터는 5년이  지난 해였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2010년에 출간되어 제13회 동리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여기에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의 작품이 소개되며 깊숙히 심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2013년에 발간된 이 시집에 마크 로스코의 시가 두 편이나 들어 있다. <마크 로스코 2> 시 일부를 읽어 보자.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코 2, 일부,  19~21쪽)



브런치 글 이미지 2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으로 시작하다니. 그의 시적 시선에 충격을 받는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시를 읽기 전에 혼자 이 그림을 봤다면, 그저 이렇게 간단하게 그린 것도 그림이라고 할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 가라> 소설을 읽으며 내 지적 호기심은 극에 다다랐다. 인터넷으로 그의 그림 자료를 찾아보다가 결국에는 그의 책을 사고 말았다. 스며오고, 번져오는 이 거대한 심장, 영혼의 떨림은 무엇일까.

시인은 생명이, 떨림이, 우주가, 내 영혼의 핏줄기가
빨갛게
스며들고, 번져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스며오고, 번져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끝내는
스며오르고, 번져오르는 것.
뿌리에서 나뭇가지로, 푸른 잎사귀로,
방금 벼락치는 시커먼 구름을 막 통과한
작은 새의 그것처럼
떠오르는 그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아름답다. 절망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끝내 날아오른다. 번져오르고, 스며오르고, 하늘끝까지, 벼락을 통과하고서라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 같은 시, <새벽에 들은 노래 2>에서 나무는 하늘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우듬지와 잔가지, 푸른 잎사귀 몽땅 나에게 내어주는 사랑이 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바로 그때, 입술 움직여 도와줘 말 한 마디 건네기 어려운 그때, 너덜너덜 넝마가 된 내 심장을 그러모아 내가 너를 찾기 전부터, 나를 먼저 찾아온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 마음
누더기.
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새벽에 들은 노래 2, 전문, 24~25)

시집의 제목으로 된 시는 없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이 추상적인 제목은 무슨 뜻일까? 나는 몇 번을 읽어도 '서랍'과 '저녁'을 계속 혼동했다.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저녁에 서랍을 넣어두었다. 서랍을 저녁에 넣어두었다. 이렇게 마구 혼동했는데, 정확한 제목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쉽게 떠올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주격을 생략할 경우, 목적격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서랍을, 저녁을,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제목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이다.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는 것과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는 것은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을까.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라고 말을 하면, 저녁을 먼저 떠올린다. 시간 개념이 우선하는 것이다. 중요도가 저녁에 있다. 하지만 '저녁을'을 뒤로 빼고 '서랍에'를 앞에 놓으면, '서랍'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서랍은 자신의 소중한 공간이다. 무언가를 넣어 보관하는 공간이다. 비밀스럽고 타인이 보지 않았으면 좋을 것들을 소중하게 보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랍이 금고처럼 황금을 보관하는 공간은 아니다. 게다가 영원히 보관해 두지도 않는다. 서랍은 또 언제든 내용물을 쉽게 바꾸거나 빼버릴 수 있는 변동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서랍의 이중적 기능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저녁'으로 넘어가보자. 왜 밤, 새벽, 아침, 오후가 아니고 저녁일까. 저녁은 캄캄한 밤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곧 밤이 온다.  캄캄하고 어두운 밤은 위축되고 불안하고 앞을 볼 수 없고 가장 위험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심리적 상태를 보여준다. 지금이 밤이라면 그건 내 상황이 매우 절망스럽고 내 심신이 매우 나약해져 있음을 뜻한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힘도 없고 용기도 없다. 타인이 발견하지 않으면 나는 어쩌면 밤사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저녁이라는 시간은 아직 내게 여유가 있는 시간이다. 아직 밤이 오지 않았으니까 뭐라도 해볼 수 있다. 입술을 열어 말을 할 수도 있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저녁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 너무 소중해서 나만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밤이 오는 걸 조금이라도 막아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일까.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저녁 잎사귀, 전문, 70~71쪽)

그냥 잎사귀가 아니고 '저녁 잎사귀'다. 저녁은 아직 볕이 있다. 볕이 저물고 있다. 햇살이 떠나고 있다. 하지만 온기가 남아 있다. 초록 잎사귀에는 낮에 받아 둔 햇살의 따스함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곧 밤이 올 것이고 저녁 잎사귀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고, 차가운 밤의 잎사귀로 바뀔 것이다. 캄캄해질 것이다. 그래서, 거기, 저녁 잎사귀는 희망의 장소다. 쉼의 장소요, 회복의 장소다. 어둠을 버텨낼, 차가운 동굴을 통과할, 벼락치는 구름을 뚫고 번져오를 시간이고 장소다.

그녀의 시집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새벽에 들은 노래, 2부-해부극장, 3부- 저녁 잎사귀, 4부-거울 저편의 겨울, 5부-캄캄한 불빛의 집

새벽, 저녁은 시간이고, 겨울은 계절이다. 잎사귀는 푸르름이고, 캄캄함은 어두움이다. 하지만 '캄캄한 불빛의 집'은 어둡고 깜깜하지만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이다. 이제 막 부모님이 집에 들어와 안방 불을 켰다. 어린 시절,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캄캄한 집이 싫어 늦게 들어갈 때가 있었다. 바깥을 어슬렁거리며 시간과 공간을 배회하다가 가족 중 누군가 들어와서 집에 불을 켜서 환한 빛이 새어나오면 그제야 안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5부 [캄캄한 불빛의 집] 표제작인 <캄캄한 불빛의 집> 시를 읽으면서는 어린 시절 그때가 떠올랐다. 불안과 허무와 공허와 알 수 없는 절망이 나를 휘감았던 그때가.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지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캄캄한 불빛의 집, 전문, 121~123)

처음 그녀의 시를 접했을 때 나는 많이 허둥댔다.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고 생각했다. 왜 이리 '피'가 많이 나오고 '어둡고 캄캄한지' 나마저도 그녀의 우울과 절망과 힘겨움과 고통과 통증과 심연의 바닥에서 같이 허우적거릴 것만 같았다.

다시 읽었다. 조금씩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떤 시는 세 번, 네 번 소리내어 읽었다. 그녀의 마음이 스며왔다. 번져왔다. 저 멀리서 스며들거나 번져들지 않고, 그녀에게서 매우 가까이 스며오고 번져왔다. 그리고 밑둥에서부터 하늘로 조금씩 스며오르기 시작했다. 저녁 잎사귀가 온 힘을 다해, 젖먹는 힘을 다해 수액을 빨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는 올라가는 시였다. 바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는 벼락치는 구름을 통과하는 새처럼 사력을 다해 올라가는 시였다.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저녁의 소묘 5, 전문, 137)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아 있는 시였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어 온기를 나누는 시였다.
눈에서 피가 흐르고, 혀가 잠기었어도
살아 있으므로, 상처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는 한강의 시를 읽음으로써, 혼자가 아님을, 나무 뿌리로부터 함께 연대하고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백 년 묵은 깊고 깊은 항아리를 깨고 저 바닥에서 생명의 수액을 퍼올리는 저녁 잎사귀가 된다.

가거라.
어서 가거라!!
어둠 속에서 충분히 웅크린 뒤, 하늘을 올려다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