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우지
나는 세심하고 감정선이 예민한 편이다.
남들이 겉으로 봤을 때는 털털하고 재밌고 시원시원해서 좋다고 말한다.
물론 그 또한 내 모습이다.
근데 그 털털함을 한 겹만 살짝 벗겨내면 쉽게 건들 수 없는 예민함이 존재한다.
남들은 쉽게 잘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의 일에서는
“그런가 보지 뭐~ 너무 신경 쓰지 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정작 나의 일이 되었을 때는 말 한마디, 그리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공기, 상대의 눈빛과 행동 등 비언어적인 요소들 까지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그냥 있는 사실을 얘기한 건데 왜?”
“에이 그냥 한 말이겠지~신경 쓰지 마”
“너한테는 장난을 못 치겠어”
학창 시절부터 사회 초년생까지 종종 들었던 말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 그들도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쉽게 넘기는 척, 소위 쿨한 척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본 진짜 나의 모습은 거름망이 아주 좁고 특정 상황을 남들보다 더 크게 느끼는 편인 것 같다.
이런 나에게 로봇 같은 남자친구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욱하는 남자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감정기복이 덜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건 그냥 감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티키타카가 잘 되고 재밌었던 건 그냥 그때의 상황이 즐겁고 설렘 가득하고 서로 업됐을 때의 얘기였던 것 같다.
내가 기쁘고 슬프고 당황스러울 때 진심이 느껴지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 카톡에서 나의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예민함이 시작됐었다.
연애 초반이었음에도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었고, 내가 혹시 AI가 아니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카톡을 끝까지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읽어 엉뚱한 내용을 얘기하는 일이 잦아 계속해서 나의 감정선을 건들고 있었다.
낯을 심하게 가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말도 잘 못하는 모습은 더 가관이었다.
사회생활을 한지가 몇 년인데 여자친구가 왜 좋은지에 대해 답변을 못한다.
“우리 아이가 숫기가 없어서요.. 허허”라고 해야 할 판이다.
남자친구에게 너무 많이 실망했다.
대체 왜 그랬냐며 그러냐고 이유를 물으니,
그는 얘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았다고 했고,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가볍게 얘기해도 되는 것을 걸으면서 얘기하는 게 대체 뭐가 이상하며, 얘기할 시간은 정말 충분했는데 도대체 왜 타이밍 운운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왜 좋은지에 대해 자주 이유를 물어봤었고, 그때마다 답변도 잘했었기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정말 황당했다.
푼수같이 굴던 친구가 머쓱해하며 자리를 떴는데 나도 집에 가고 싶었다.
항상 핑계가 많고, 본인이 한번 정한 것은 절대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원래 난 그래. 이미 다 해봤는데 안 됐어” 라며 스스로 정해놓은 것이 아주 많은 고정적 마인드셋의 표본이다.
안 맞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갑자기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때 이 사람은 과연 나를 위해 맞서 싸워줄 것인가 의문이 든다. 한마디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연이어지는 사건들로 인해 내 마음속에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미래와 불행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에 맴돌지만, 만약 내가 이런 것들을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싶기도 했다.
근데, 다 알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별을 고해도 절대로 붙잡지 않고 순순히 알겠다고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럴게 할 정도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일이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직전이라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데, 나의 마음은 너무도 불안했다.
2024년 8월.
우리는 마치 단물 다 빠진 껌인 것 같았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