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우지
"기념일은 챙기는 편이야?
우리 기념일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처음 고백할 때 꽃다발을 사 왔던 남자친구는 평상시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피곤해하는 나를 위해 본인이 마셔봤던 커피를 사서 일일이 소분해 주었고,
평소 만날 때마다 머리끈을 찾는 나를 위해 머리끈도 사 왔으며,
더위에 약한 나를 위해 차 안에 두 종류의 부채를 구비해 두었다.
당시 몸에 갑작스럽게 트러블이 나서 피부과를 다닐 때였는데, 등에 약을 쉽게 바르라며 패드가 달린 기다란 봉까지 사주기도 했다. 사실 이건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말이다.
이런 스타일의 남자친구는 당연히 기념일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이가 있으니 50일은 챙기지 말고 100일부터 챙기자고 약속했었다.
2024년 5월 중순,
50일 당일은 아마 금요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친구들과의 모임을 잡아놔서 그날은 만나지 못했고 주말에 외곽에 다녀오기로 했다.
토요일, 남자친구다 차 안에서 갑자기 쇼핑백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뭐야?"
"선물이야. 차에 두면 녹을 수도 있어서 미리 주려고"
세상에나, 선물은 명품 브랜드 립스틱이었다. 내가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값비싼 브랜드였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편지도 함께 들어있었다.
"50일 안 챙기기로 했는데 왜 선물을 사 왔어 난 아무것도 준비를 못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살짝 투덜거렸지만 사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 사람도 선물 다운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챙겨주는 건 정말 고마웠는데, 솔직히 그간의 선물을 보면서 앞으로 계속 이런 걸 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아주 살짝 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거 입술 온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건데,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유튜브 열심히 찾아봤지. 인기 많더라"
여자친구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는 세심한 남자친구라니,
난 복 받은 여자다.
아니, 복 받은 여자였다.
이때까지는.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