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우지
" 나.. 파혼 이력이 있어"
....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나의 놀란 심장을 달래줄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수화기 너머 그의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그 적막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길었다.
아니, 길었을 것이다.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까.
그리고 지금 얼마나 마음이 복잡할까.
하지만 길고 긴 정적은 나에게 합당한 정적이었다.
잠시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어쩌다가 파혼을 한 거야?"
"말하자면 정말 긴데.. 내가 전여자친구라고 했던 사람이랑 신혼여행 가서 헤어졌어."
"신혼여행을 가서 헤어졌다고? 그럼 결혼식도 한 거고?"
"응 결혼식은 했지만 혼인신고는 안 해서 서류는 깨끗해. 어떤 사람은 사실혼이라고도 하던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같이 산적도 없어"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파혼의 뜻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이혼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결혼'이라는 것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반의어는 명백하게도 '이혼'이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파혼'이라는 건 '약혼(혼인을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쉽게 말하면, 결혼 준비과정에서 결혼이 결렬된 것이 바로 파혼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이렇게 잘 아는 내가,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해 버렸다.
'그래. 혼인신고 한 것도 아닌데 뭐'
이어지는 그의 긴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나는 순전히 그의 입장에서만 듣는 것이기에 이야기의 흐름은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는 철저하게 피해자였다.
여행지에서 전사람과 싸우며 본인 몸에 상처가 날 정도였지만,
그 사람과는 돌아오는 길에 이미 잘 풀렸고,
사건의 진짜 시작은 여자 쪽의 부모 때문이었다는 이야기..
본인의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는 이야기..
1년 뒤 결혼기념일 축하한다며 상품권을 주는 회사 덕에 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내가 좋아도 고민이 되었다고 했다. 가까운 지인이 해주는 소개팅이었다면 사실대로 본인의 상황을 미리 말하고 소개팅을 할지 선택하게끔 했을 텐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감정을 쌓아왔기에 내가 약간의 표현을 하더라도 담백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에둘러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첫 만남에 내가 한 이야기 때문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했다.
"요즘은 속이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파혼했는지도 알아봐야 하더라고요. 아니 글쎄 전에 어떤 사람과 만나기 전에 연락하는데, 이전 카톡 상태 메시지를 보니 누가 봐도 결혼날짜와 웨딩홀인 거 있죠?"
그 이후로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 물으니,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사귀기 전에 나에게 꼭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널 속일 의도는 없었지만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웠어.'
'이미 마음이 커져버려서 기회를 놓쳤어. 근데 꼭 얘기하려고 했었어'
그가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나에겐 다 똑같이 들렸다.. 드라마 대사인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썰인지 어쩜 변명이 이렇게 다 같은 걸까.
긴 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하며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그저 일련의 사건들을 들었을 뿐, 우린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통화를 끝냈다.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