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를 쓰는 일

d+9

by regine

숨긴 제목 : 안녕 카메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거 외에, 매일 하고자 하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일기 쓰기.

브런치에는 특정 주제를 잡아 글을 풀어보는 연습을 한다면 일기는 그런 거 없이, 중구난방으로 생각을 나열하거나 한 일을 적는다.

컴퓨터를 가져와 글 쓰는 게 수월하긴 하지만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로 적는 일도 재미있거든.


오기 전에 빈 노트를 사지 못해, 둘째 날이었던가, 이곳에서 노트를 샀고 그 뒤로 매일 한 페이지는 영수증이나 티켓을, 다른 페이지에는 그날의 일기를 적는 데에 노트를 활용하고 있다.

카드로 결제를 안 하면 영수증을 안주는 곳이 적지 않아 그럴 때마다 ‘un ticket, svp’라고 덧붙여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영수증을 붙이는 건 아니고, 그 영수증으로 기억할 만한 일들이 있다 하면 붙인다. (간단하게 물 사고 이런 건 안 붙인다는 소리다)

덕분에 첫 번째 집을 나오며 모아둔 폐지도 작은 쇼핑백 하나를 채웠다. 이걸 버리면서 의문인 건 프랑스는 종이를 따로 버리지 않는다는 거.

모아둔 페트병도 꽤 되었다. 하루에 물을 500ml는 잘 마시고 있었구나.


체크아웃을 하고 나와 두 번째 집 근처 역에 도착했다.

계단도 많고 나의 짐도 많았다,, 감사하게도 계단마다 조금씩 손을 걷어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올라가는 속도가 느리니 뒤에서 천천히 오시던 할아버지에게 길을 비켜드리며 먼저 가시라고 했는데, 심지어 그분도 가방을 올리는 일을 도와주셨다... 그렇게 몇 번의 ‘merci, c’est gentil, bonne journée’라는 인사를 했을까. 그럼에도 나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여 잠깐 멈춰있다가 체크인을 하려던 걸 계획을 바꿔 아예 역 앞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밀린 일기를 쓰자’


올해 연도에는 작은 다이어리를 샀었다. 매일 그 칸을 채우는 것도 그렇게 버거운 일상이었다. 뭐 덕분에 빈칸은 많이 없는 편이었다. ‘하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였으니까.

여행을 오면 하루를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서 써서 그런 걸까, 제법 큰 사이즈의 빈 노트를 집어 들었던 것도 그럴 나를 알아서였을 거다.


오늘 도착하는 H를 기다리며 3일 치 밀린 일기를 썼다. 밀려있는 일기지만 막상 첫 문장을 시작하니 글이 술술 쓰여서 그 속도를 따라가기에 펜을 쥔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그리고 알았다. ‘아, 이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머릿속 생각들이 정리가 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단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일기나 글이 더 잘 써지나 보다. 대화로 풀지 못하니 다른 경로인 글쓰기로 생각이 배출되는 거랄까.


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어제의 일기까지 다 썼다. 다 쓰고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디게 느껴지더라. 그녀가 도착하기로는 한 시간 남짓이 남았기에 컴퓨터를 가방에서 꺼냈다. 주제를 정하고 글을 반쯤 적었을까, H가 왔다!!



그녀와 지내는 동안은 어떤 하루 루틴을 가져가게 될까. 급하게 온 그녀의 목도 축일 겸 간단히 배도 채우느라 새로운 숙소에 도착한 건 해가 다 져서였다. 내부 공원이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아침엔 더 예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이번 숙소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이전보다 층수는 낮지만 계단이 훨씬 좁고 가파른 경사를 가지고 있었다. 겨우 겨우 올라와 도착한 집. 이전 집보다 계단이 좁고 어두워서 그랬나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집의 내부는 딱 아늑한 크기였다. 거실의 소파가 짙은 갈색으로 크게 놓여 있고, 방이 두 개가 거실과 연달아 붙어 있었다. 부지런히 구석의 조명들을 다 켜니 그 아늑한 느낌이 배가 되었다. H와 6일을, 그리고 나 혼자서 3일을 보내게 될 이곳. 잘 부탁해 !


-

짐을 풀고 기념으로 사진을 하나 찍으려는데, 응?

카메라가 없다.

짐을 다 뒤져도 없었다.

급기야 루이에게 연락해서 혹시 이런 카메라가 없었는지 물었다.

없단다.

기억을 다시 촘촘히 떠올려 봤다.

아....

.......

집에서 북역까진 십오 분 남짓.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

역에 도착해서 숨을 돌리다가 카메라가 작은 보조가방에서 걸리적거리길래 그걸 백팩에 넣어두었더랬다. 그리고 지하철을 탔을 때 붐비는 상황에서 - 탈 때부터 조금 유난이었던 게 나보다 먼저 탄 사람은 자기 뒤에 공간이 있는데도 멀뚱히 서있었고, 내 뒤에 탄 사람은 나를 심하게 밀쳤다. 그리고 정거장 하나를 채 못 가서는 옆에 사람이 동전을 내 캐리어와 다리 사이로 떨어뜨렸지. 그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내 다리 사이로 몸을 숙여 나는 다리 하나를 들어줘야 했고, 캐리어도 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린 채 그들이 내렸고 나도 둘러맨 백팩을 앞으로 메어둘 공간이 생겨 가방을 보는데, 그때 백팩 지퍼가 열려있었다. 이상하네 하고 닫았었지....


도착할 역은 해당 라인의 종착지여서 점점 사람들이 없었다. 덕분에 저런 나름의 여유도 즐기고..

저때만 해도 몰랐지....



카메라도 카메라지만 당장 그 카메라에 담겨 있던 6장 남은 필름이 생각났다. 찍혀있던 30장이라도 돌려줘... 안돼, 안돼, 이럴 수 없어...

그리곤 이내 그런 상황을 당한 나를 자책했다.

여행이 길어진 것도 있었고, 공식적으로 위험한 동네를 벗어난 다는 생각에 살짝 긴장이 풀렸던 것도 같다.


여권 안 잃어버린 게 어디야, 뭐 덕분에 가지고 다니는 짐 하나 줄었네. 라고 마음을 가다듬은 건

다시 나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그 재료로 저녁을 해 먹고 나서,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였다.


+에어비엔비 후기를 남기며, 루이에게 개인 메시지로 거실 테이블 식탁보를 벗긴 거에 대한 작은 사과를 보냈다. 그가 오기 전에 그걸 덮었어야 완성인 건데 마침 나는 캐리어 위에 올라가 짐을 누르고 있던 찰나였거든..

공개적인 후기로는 그 테이블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던 순간을 제일 좋아했으며, 잊지 못할 거라는 인사를 적었다. 6층 때문에 이 집을 포기한다면 그건 큰 실수일 거라는 말도 ㅎㅎ



이윽고 그에게 개인 메시지로 답장이 왔다.

‘그 식탁보를 벗긴 건 잘한 거야, 나 역시 그 크고 분위기 있는 테이블에서 일하는 걸 매우 좋아해 :-)’



-

글을 올리며 다시 상기시켜보니 카메라 일은 아직도 억울하고.. 화가 난다. 그 안에 담긴 필름이 너무 아쉽다 정말로... 필름으로 찍은 장면은 일부러 핸드폰으로는 담지 않아서 어떤 장면들이 담겨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지.

여행에서 늘 좋은 일만 있길 바란 건 아니지만, 조금 더 긴장하고 잘 다녀야겠다.


위의 사진은 지금은 잃어버린.. 카메라를 처음 사서 받아 들고 찍은 것인데, 루이에게 '이거 못 봤니' 라며 첨부할 사진을 찾다가 찾게 된 것이다. 찍힌 날짜를 보니 17년 12월 초.

중고였지만 그래서였나 손에 더 착 감겼고, 신용카드를 처음 만들고서 처음으로 할부거래 ㅋㅋㅋ를 이용하게 했던 아이였다.

카메라야 안녕.. 하하



내일 일기를 쓰면서도 이게 또 복기되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얽매이지 않을 수 있기를.. 하하하하

d+9

keyword
이전 09화rue saint-mat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