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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만,
‘가져간 뒤 버리고 와도 되는 물건’을 제일 먼저 체크하는 편이다.
항상 그 목록의 위에 있는 건 수건.
우리 집에서 수건이란, 우선 수건으로 충분히 수명을 다하면 (표면이 까칠해진다거나, 헤진다거나) 걸레가 되어 또 새롭게 쓰일 수 있는 물건이다.
빨래를 갤 때, 수건은 세등분으로 접고, 걸레로 쓸 건 절반으로 접어 두는 게 나름의 규칙이랄까.
헌데 수건에서 걸레로 가는 기준이 엄마와 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나는 조금 더 수건의 조건의 엄격한 편이고 ㅎㅎ
그래서 내가 빨래를 갠 날은 새로이 걸레가 된 수건의 수가 많고, (살갗에 조금 까칠게 느껴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반을 접는다.) 엄마가 빨래를 갠 날은 수건은 수건일 뿐, 걸레가 된 수건은 없다. ㅋㅋㅋㅋ
매번 옥신각신하다가, 여행 올 때 챙긴 수건 두장을 여행지에 버리고 오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ㅎㅎ
걸레가 되어야 할 수건이 계속 수건으로 남느니, 아예 치워버리는 묘수를 둔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여행이 잦았기에 버린 수건이 꽤 되는데도 집엔 아직 걸레보다 수건이 많다. 엄마가 빨래를 개는 날이 더 많은 게 그 이유일지도.
수건 외에는 필수적은 아니다만, 그다음 순서로 고려되는 건 옷이나 신발이 되겠다. 혹은 책.
한 번만 읽고 말게 될 책은 웬만하면 구매를 안 하는 편이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 쉬운 일이 아니더라. 책을 읽으며 낙서나 밑줄을 긋는 걸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번 읽고 말 책인지 읽기 전에 알기도 어렵고, 또 그렇다고 읽어보고 싶은 걸 안 읽어 볼 순 없잖나.. (꾸준히 돈을 벌어야 하는 팔자,,)
무튼 이번 여행엔 신발 두 켤레가 그 대상이 되었다.
한 개는 운동화, 한 개는 워커.
운동화는 사실 파리의 두 번째 집으로 옮겨 오면서 버렸다. 사실 이렇게 일찍 버릴 건 아니었는데,
파리의 돌바닥을 걷는데 발바닥이 너무 아파 오래가지 못하겠다 생각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그리고 워커가 남았다.
생각해보니 이 워커는 20살 대학에 입학하고 산 신발이었다. 내년이면 이 신발을 사고 신은지 꼬박 십 년이 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잘 쓴 물건이 이 신발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없었다.
없다고? 응 정말로 없었다.
그나마 그다음으로 내 손이 오래갔던 건 일상에서 가끔, 그리고 여행 갈 때마다 챙기는 백팩이 있었다. 백팩에 짐을 넣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널 언제 샀더라, 아마 22살..? 아빠가 대학 입학 선물로 사주셨던 같은 브랜드의 조금 작은, 초록색의 가방이 밑창이 다 헤지고 어깨끈이 떨어져 구매한 거였다. (물건을 애지중지 하는 편은 분명히 아니다. 근데 그 초록색 가방은 막 쓰긴 했었지..)
(끈도 사용감에 따라 닳아버린 걸까, 신고 나오면 하루에 한두 번은 꼭 고쳐 매 줘야 한다.)
이 워커를 처음 사서 신었을 때,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단단한 가죽 재질이다 보니, 처음부터 ‘내 신발’이란 느낌은 없었다. 발목 뒤쪽에 피가 나 밴드와 휴지를 덧 데어 신기도 하고, 그러다 요령이 생긴 게 신발 발목 안에 아예 바지 밑단을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츰 길들여지며, 무게가 꽤 나감에도 불구하고, 내겐 이 신발이 제일 편한 신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름엔 다소 손이 안 가긴 하지만, 더위가 가실 쯤이면 신발장 속 신발 중에 일 순위였던 건 분명하다.
특히나 날씨가 궂을 때, 가구 공장에서 작업을 할 때, 쇼룸에서 가구를 옮기거나 행사장 철거를 가야 할 때...
내 발에 제일 잘 맞고, 단단한 가죽 표면은 외부 충격으로부터 발을 잘 보호해주니, 점차 ‘작업화’로 분류되어 신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발에 갈라진 부분, 상처 난 흠집이 꽤 많았다.
같은 브랜드에서 다른 디자인을 사기도 했는데, 물론 처음 길들여지는 게 쉽진 않지만 그 이후엔 '내 신발’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첫 번째 신발로 알게 되었기도 했고, 기존의 신발은 점차 내가 출근하는 곳에 챙겨 신고 가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발엔 너무 편한 신발이지만 회사에서 맡은 주된 업무는 '작업’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종종 ‘작업’이 필요할 땐 첫 번째로 산, 오래된 신발을 챙겼더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신발을 버리고 올 생각으로 챙겼었다니.
불과 십여 일 전의 내가 그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내 생각에 동조할 생각이 없다. ㅎㅎㅎ
챙겨 온 덕에 더 자주 신게 되었고, 그랬기에 더 확신이 들었다.
신발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못하게 되어 ‘신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먼저 버리진 않겠다고 말이지.
오늘도 오전엔 비가 오락가락했기에 다른 여지없이 신고 나가기로 선택했던 이 신발을 말이다.
나랑 파리도 마저 걷고, 런던도 가고, 그리고 서울에서도 함께하자. 또 다른 곳도 !!!
+ 엊그제였나, 전시장을 가기 위해 빗물에 젖은 숲길을 가로질러야 할 때가 있었다.
당시 신고 있던 건 오늘 얘기한 신발이 아닌 다른 신발이었고, 그 입구에서 집에 두고 온 신발이, 오늘 신지 않은 '그 신발’이 어찌나 생각났던지ㅎㅎㅎ
+ S가 떠나고 나서부터였다. 전시를 보러 가서 설명을 읽기 시작한 게.
혼자서 보는 전시였기에 더 취향적으로 골라가게 된 만큼 관심이 컸고 그로 인해 자발적인 궁금증에 그리 된걸 수도 있지만,
그녀가 기존에 보던 것 외에 다른 부분도 보며 전시를 즐겼듯이, 방향은 달라도 나 역시 내가 안 하던 방법을 시도해 본 거지.
결과는? 쉽진 않았지만, 만족 !!!
근데 그 와중에 나는 이런 게 너무 보이는 거다..
(보이시나요, 제가 말하는 '이런 부분'..? ㅎㅎㅎ)
나 역시 이런 작업을 해봐서 알겠다만 그래도 여긴 5일 뒤에 없어지진 않잖아(그랬다고 그랬던 거 아닙니다만), 게다가 여긴 프랑스의 수도, 파리잖아요...? ㅋㅋㅋㅋ 근데 또 반갑고 좋았다.
전시에 집중해있다가도 잠시 쉬는 시간을 받은 느낌이랄까.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더라.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 한 일. 그러다 보니 이런 부분은 당연한, 일어날 수 있음 직한 자연스러운 일들. 그런 걸 떠올리면 오히려 더 그 공간에, 그 전시에 집중이 잘되기도 하고 말이지.
평소대로만 전시를 봤다면 느끼지 못했을 건데 안 해본걸 시도했기에 마주한 상황이었다는 게 내겐 중요했다. 점점 보던 것만 보고 하던 것만 하려던 모습이 보였던 찰나였기 때문에. 지니고 있던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만나 또 어떤 내가 만들어질까?
그리고 신발을 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짐을 버려야 하는 데 어떤 걸 버려야 할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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