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스러운 일

d+11

by regine

수고스러운 일, 그런 일이야 나열해보자면 참 많겠지만 이 글을 쓰게 만든 ‘수고스러운 일’이라 하면 바로 요리.


음식을 잘 가리는 편이 아지만 요리는 내게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엄마가 음식을 잘하시는 편이라 ‘너도 나중에 커서 요리 잘하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그 덕에 배운 표현이 있다면 ‘어깨너머로 배우는 일’이었다.

요리 잘하는 엄마가 계시고, 그런 표현을 알고 있다만, 정작 그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


요리가 아닌 조리는 시작이 빠른 편이었다.

동생과 나는 밥을 먹어야 했고,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엄마는 직장을 다니셨다.

엄마는 그런 우릴 위해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식품들을 사다 놓으셨고,

가스렌지 불을 켜는 법과 밸브를 잠그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동생과 밥을 먹을 때면 마치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밥을 먹기 위해 준비하거나 치우는 일련의 과정들은 내가 보기에도 엄마가 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거든. 그때부터였나,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땐 그게 좋았더랬다.


내가 생각하는 요리란, 레시피를 찾아보고 (머릿속에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장을 봐와 사온 재료를 손질해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

문구점 구경 외에도 마트나 시장을 구경하는 걸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 이렇다 한 낯선 재료는 많이 없다.

보이는 게 다만 ‘재료’에서 끝이 나버리는 경우가 많지. ㅎㅎ


직접 요리를 해보기 시작한 건 타지에서 혼자 살았을 때였던 것 같다.

여러모로 내 인생에서, 그 10개월을 참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실마리를 떠올려보거나 처음이었던 거 등등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하면 그즈음부터인 게 참 많다.


무튼 그때, 돈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 번 큰 마트에 들르는 일은 어쩌면 제일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처음엔 그 가짓수와 종류에 압도당했다. 요거트맛이 이렇게 많다고? ㅋㅋㅋ

시작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요거트, 콘푸레이크, 우유, 계란, 치즈, 그리고 과일들.


그러다가 파스타 소스와 면을 사서 파스타를 해 먹어보기도 하고,

샐러드에 비네거와 올리브 오일을 따로 둘러 먹어보기도 했다.

소금, 후추, 바질, 페페론치노, 카레 가루...

눈을 즐겁게만 했던 것들을 내가 써본다는, 그 기분은 꽤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문제는 장 보는데 한 시간, 정리하고 요리하는 데 삼십 분 ~ 한 시간, 먹는 건 십분. 그리고 다시 정리가 삼십 분.

무언가 만들어 먹는 건 재밌는 일이었지만, 그걸 십분 만에 먹고 나니 이게 다 일이라고 느껴졌다.

요리라는 걸 ‘수고스러운 일’이라 느끼게 된 것이다.


장보는 물가가 사 먹는 물가보다 싸니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그때 정한 규칙이 있다면 요리 후 뒷정리 및 설거지를 할 때, 그때에만 나에게 한국어를 허용하는 거였다.

팟캐스트로 한국 라디오를 듣는데, 디제이들이나 패널들이 얘기하는 걸 그렇게 요리한 날, 삼십 분 정도 들을 수 있었다.

웃기지만 단순히 다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ㅋㅋㅋㅋ 모국어 만세 !

그래서인지 설거지하는 일이 있다면 앞장서서 하는 편이다. 씻겨진 그릇을 세워놓고 싱크대의 물기를 닦는 일만큼 상쾌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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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가 도착한 첫날, 마침 집 근처에 큰 마트가 있어 함께 들렀다.

내 머릿속에서 장을 봐올 것이라곤 딱히.. 글쎄 물과 요거트 정도?

‘장 본다’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였지.


물과 요거트를 비롯해 와인, 맥주, 콜라를 담았다.

안주 삼을 과자 하나랑 말린 햄도.

지나가다 들린 정육 코너. 고기...? 고기 !!

그리하여 샐러드와 달걀, 토마토, 버터와 홀그레인 머스타드가 추가로 담겼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나눠 들고 오는데 서로 이 상황이 웃겨 웃었더랬다.

그렇게 하여 그럴싸한 저녁 한 끼를 든든히 먹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꽤 묵직하게 떨어져 내는 소리도 참 좋았다.



집에서 먹으니 조금 더 음식에 집중도 되는 것 같고, 급하게 그릇을 치워가는 서버가 없으니 남은 샐러드를 안주삼아 남은 와인을 비우며 얘기도 할 수 있었고 말이지.


그리고 새삼 신기했더랬다.

재료를 사 와 손질해 요리해 먹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약간의 수고’를 더한다면 말이다.


그다음 날 아침엔 내가 할 수 있는 간단한 요리를 준비했다.

라흐동과 계란, 그리고 샐러드.

H는 스크램블을 주문했다. 나는 늘 먹듯이 계란 두 개 ㅎㅎ 한 개는 늘 뭔가 모자라니까!





오늘 오전에 들렀던 바스띠유 시장은 파리에 올 때마다 일정에 꼭 넣어서 갔던 곳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네 번째였는데, 매번 느끼고 온 게 달랐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과 두 번째엔 그저 신기했고, 세 번째 땐 그 분위기를 즐겼다면

오늘의 방문은, 그곳에 들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장을 봤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귤이나 사과, 크레페를 사 먹는 곳이었는데...

거실 테이블에 둘 튤립을 한 부케, 관자 한 통, 레몬으로 여분 가방이 이미 꽉 찼더랬다.



시장에서 장 보는 거 역시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장 첫 오전 일정이었기에 우린 샀던 모든 걸 하루 종일 들고 다니는 수고를 들였고...

추가로 바게트와 시금치, 마늘, 와인을 사들고 와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샐러드와 마늘을 손질하고 테이블을 차렸다.

H는 관자를 손질하고 불을 켜 마늘과 버터, 그리고 관자를 구웠다.


관자를 사게 된 건, 고기를 먹고 나서 ‘그래도 생선은 집에서 먹기 좀 그렇겠지?’에서 시작된 거였다.

그런 마음으로 생선가게 매대를 올려다봤는데 마침 세일(중요)하고 있던 관자가 놓여 있었고.

무튼 고기를 굽거나 계란 프라이를 하는 것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차려진 식탁.

맛은? 말해 뭐해. 너무 맛있었지.



우린 이렇게 까지 요리 해먹을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다행인 건, 서로가 이런 수고스러움을 기꺼이 즐겼다는 것.

장을 봐오고 요리를 해 차려 먹는 것.

맛있는 식당에 찾아가 줄을 서는 일 역시 수고스러운 일중에 하나겠으나,

특히 나에게 ‘수고스러운 일’이었던 건 무엇보다 요리였기에, 그걸 앞장 서준 H에게 고마움이 많이 드는 하루들이 벌써 삼일이나 지났다.



하루를 같이 보내고서 저녁엔 컴퓨터를 켜는데, 그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 H가 걱정을 했다.

그 늦은 시간이라는 게, 새벽 세시가 넘어가기 시작했거든.

미룰 수 없기에 그렇게 했던 거지만, 다행히 내 컨디션은 괜찮다.

이것 역시 내가 수고스러움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거려나.


사실 오늘의 글(d+11)은 그다음 날인 금요일(d+12)에 쓰이고 있다.

어제의 푸짐한 저녁 식사는 나를 소파에서 재웠기 때문에.. 금요일엔 브뤼셀로 당일치기 일정이 있어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컴퓨터를 들고 기차를 타서, 카페에 도착에 글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수고스러운 일들에 대해선 앞으로도 꾸준히 생각해볼 예정이다.

내 이야기도 그렇다만, 개개인들마다 다른 부분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당장은 H에게 물어봐야겠다 : 그녀에겐 어떤 일이 수고스럽게 느껴지는지, 이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런 게 뭐가 있는지 말이다.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내게 알려준 다면 더 좋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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