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오전

d+22

by regine

제목을 쓰고 글을 시작할 때 매일 그 날 아침의 얘기들을 간단히 적었었는데, 오늘은 그게 곧 글의 주 내용이 될 예정이다.


그전에 어제 저녁 얘기를 잠깐 하자면, 집에 돌아와서는 어제의 글을 쓰고 그 뒤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서울 시간에 맞춰 그걸 마치고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누운 시간은 여기 시간으로 새벽 세시 즈음이었다. 늦게 눕긴 했지만 아침 알람은 아홉 시와 아홉 시 반 두 개를 맞춰뒀었다.


눈을 뜨니 마침 맞춰둔 첫 번째 알림이 울리기 오 분 전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졌지? 아마 어제 비교적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 덕분이겠다. 오늘도 하늘은 예쁘네. 고개를 삐쭉 내밀어 창 너머를 확인한 후, 다시 베개에 볼을 댔다. 종종 찾아 듣던 가수의 새로운 앨범이 나온 걸 그제야 봤다. 앨범 전체를 랜덤 재생으로 돌려둔 뒤 두세 곡쯤 지났을 때쯤에야 이불 속에서 나왔다.


히야신스의 상태를 먼저 확인했다. 겉흙은 아직 촉촉했다. 잎사귀들(?)이 점점 흙에서 올라와 쭉쭉 자라고 있었다. 처음 가져다 놓았을 때와 비교하면 그 성장세가 엄청난 속도였다.. 게다가 잎사귀 사이에 숨겨져 있던 꽃이 피어날 망울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매일 쳐다봐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게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큰 변화를 보여주니 되려 무섭기도 했다. 너 원래 이래..?



이걸 올린 사진을 보고 H가 먹는 거냐고 연락이 왔었다. 음...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는데 히야신스라는 꽃이야 ^^ (히야신스 사진 첨부) ㅋㅋㅋㅋㅋㅋㅋ


포트에 물을 올려두고 전원 스위치를 켰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어 묵직한 낮은 유리잔에 담았고, 커피 가루를 두 봉지 털어 작은 유리잔에 담았다.



커피 가루는 영국으로 넘어오기 전에 프랑스에서 사 온 걸로 종류가 두 개 있었다. 까르푸 PB제품이랑 커피 브랜드의 것. 근데 까르푸 것이 더 내 입맛에 맞았다. 그렇다고 다른 걸 버릴 순 없어 두 개를 각각 한포씩 풀어봤는데 꽤 괜찮아 결국 계속 그렇게 만들어 먹고 있다. 가루가 굵은 게 까르푸고 고른 게 커피 브랜드의 것이다.

물가가 비싼 이곳에서 밖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오렌지 쥬스 까지 시키는 건 지나친 사치였다.. 그래서 사온 가루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쥬스와 함께 먹는 건 집에서, 밖에선 주로 플랫화이트나 롱블랙을 마셨다. 밖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은 하루 한 번 정도가 일반적이었고 집에선 일어나서 한번, 저녁에 글을 쓸 때 또 한 번.


잔은 엊그제 SLG에 갔을 때 사 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도시에 들를 때마다 작은 유리잔을 사둔 갯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잔을 보다가 작은 텀블러가 눈에 들어왔었는데 작아서 휴대성은 좋겠다만 내부는 씻는 게 여간 번거롭게 생겨있었다. 고민하다가 잔만 계산하는데 내가 텀블러도 본 걸 지켜보고 있었는지 직원이 말을 붙였다.

'네가 봤던 텀블러는 호주 브랜드야. 사실 어제 호주 사람이 와서 자기가 저걸 쓰고 있는데 뚜껑을 제 아무리 닫아도 내용물이 샌다고 말해 줬어. 잔은 새지 않을 거니까, 굿 초이스 !'

ㅎㅎㅎㅎ

만약 텀블러를 샀다면 집에서 나갈 때 에스프레소와 얼음, 설탕을 넣어갈 생각이었는데... 천가방에 찐뜩해진 커피가 흘러 있는 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일이었다.


포트에 올려둔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창밖으로 나갔다. 어제도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바닥에 있는 흙들에 습기가 남아 슬리퍼 바닥에 그 질은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새소리가 불규칙적으로 - 제 나름대로는 규칙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 들렸고, 고개를 들어 바람이 연기처럼 지나가는 걸 봤다. 그도 그럴게, 어제보다 바람이 제법 부는 편이었다.



물이 다 끓었는지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오니 푸근한 공기의 온기가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니 아직 열 시가 안되어있었다.


나갈 준비를 하고 문밖을 나서니 열한 시.

파리에선 시차 적응을 못한 게 남아있어 여기 시간으로 일곱 시에 일어났었는데 런던에선 도통 그래지 질 않았으니.. 오늘이 제일 일찍 일어난 거였다. 오전에 일찍 눈뜨니 좋네. 부릴 수 있는 늦장은 충분히 부린 거 같은데도, 가질 수 있는 오전 시간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사실 서울에서도, 아침형 인간은 나와는 다른 얘기였다.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눕기 전부터 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더랬다.

출근을 한다면 아홉 시에 나가, 퇴근하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들어오면 그새 자정이었으니, 그래서인지 더 새벽에 집착을 했던 것 같다.

'온전한 나의 시간'을 하루에 남겨보려고.

그렇다고 그 시간에 딱히 별다른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두 시간 동안 소파에 부동자세로 기대어 앉아 멍을 때리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했다.

생산적인 '온전한 나의 시간'을 매일 기대했지만, 기대와 다르게 대체로 소비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꼭 두세 시가 되어야 눈을 감았었더랬다. 그러니 오전엔 또 바쁘고 급하고. 무한 반복.


그랬기에 '온전한 나의 시간'이 오전인 적은 거의 없었다. 출근을 해야 해서 혹은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 바쁜, 그렇게 보낸 오전들만 가득한 인생이었다.

오늘의 오전은 그래서 좀 특별했던 것 같다. 내겐 없던, '온전한 오전'으로 시작한 하루였으니까.


+

나가서 곧장 도착한 곳은 national portrait gallery.


특별 전시 두 개에 상설 전시관까지. 관람자로 가볼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다닌 셈이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렇게 되어있더라 ㅎㅎ 어제 잠깐 머물 요량으로 들렀다면 오늘의 이런 집중이 가능했을까? 이곳에서 몇 시간을 있었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눈으로 많이 보고 폰으로도 많이 찍어둔 탓에 벌써 배터리가 꽤 닳아 있었다.


갤러리에서 나오니 앞에 펼쳐진 광장에선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다. 허기가 느껴진 건 아닌데 뭐라도 먹어야 할 분위기였다ㅎㅎ 그래서 이 곳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 !



이다음 행선지는 이 곳에서 삼십 분 정도 걸렸다. 주말엔 전시 티켓이 평일보다 2파운드나 비싸길래, 일단 주말이 아니면 가보자 했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책을 오늘 오전에 읽었는데 마침 그 챕터에 그곳에 관한 얘기가 있었었던 터라 곧장 가보자 떠올랐다.

도착하니 그새 해가 져 있었는데, 덕분에 그 웅장하고 복잡한 공간들이 그렇게만 보이진 않더라. 어느 건물은 백색 조명 아래 컴퓨터 앞에 앉은 사람들만 가득히 보였고, 또 어떤 건물엔 중간중간 전구색이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책에선 이곳을 '거대한 복합문화센터 - 상업공간과 주거 공간, 런던 뮤지엄과 아트센터 및 학교까지 총망라된 바티칸 콤플렉스'로 설명해 놨었는데 알고 봐서 그런지 정말 그게 딱 보였다.

아트센터 정 반대편에 지하철 출구가 있었기에 그곳에서 나와 거의 건물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아트센터에 도착했다.



전시는 밤의 문화, 캬바레에 관한 것이었는데 역시나 툴르즈 로트렉의 이름도 있었다.

퐁피두에서 사 온 그에 관한 책은 언제 읽을 거냐며 ㅎㅎㅎ... 그새 영어권에 왔다고 불어가 잘 안 읽혔다.. 인간은 정말 적응의 동물이다. 시차 적응이 완벽히 된 나도 그렇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의 오전을 즐겼던 리듬도 기억해서 남은 날 동안 또 한 번 '온전한 오전'을 갖게 되길.


+

저녁에 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환기를 위해 닫아 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는 일이다. 그러다가 하늘을 봤는데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위성인지 별인지 모르겠지만 저걸 본 게 처음이니 오늘 새벽엔 비가 안 올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날씨 예보를 켰는데 새벽을 지나 오전부터 비가 온다고... ㅎㅎ 내일도 워커를 신어야겠구나..

낮엔 비가 안 와도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젖은 흙바닥이 꽤 많아서 운동화는 런던 와서 한 번도 못 신었다. 버리고 갈 운명이라 한 번은 신고 싶은데 그게 언제가 될 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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