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짙어지는 날

d+23

by regine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이 말에는 비 오기 전/후 상황도 좋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있다. 비가 내리기 전에 날이 흐려져있는 때와 비가 내려 나뭇잎과 땅이 촉촉 해져있을 때를 말이지.

그렇다고 맑은 날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늘 날씨가 좋아요' 라는 표현은 맑은 날에만 쓰는 사회적 약속 같은 거란 게 아쉽지만 나 역시 그런 날 그런 표현을 쓰니까.

다만 생일날엔 하늘에 해가 쨍하고 뜨기보단 비가 내리면 좋겠다. 일 년에 단 하루, 내가 태어났다는 그 하나로, 어제나 내일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날에 반가울 날씨라면 그게 좋아하는 날씨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사촌오빠의 디지털카메라를 빌려 들고 다녔다.

스스로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를 인지했던 건, 초등학교 때 한국 민속촌으로 소풍을 가는 날 아빠가 내게 쥐어준 일회용 카메라였다. 그걸 들고 하루 종일 눈에 보이는 걸 찍었다. 그리고 그걸 인화하러 동네 사진관에 들렀었는데, 아저씨가 '이거 네가 찍은 거 맞냐' 해서 어리둥절해하며 그렇다 했다. 당장엔 아저씨의 질문의 뜻을 이해 못했던 거다. 이윽고 신이나 엄마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아빠가 집에 돌아오실 때까지 이걸 얼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던 저녁을 기억한다. 아저씨는 그냥 내가 귀여워 보여 해준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말 한마디의 힘이란. 더군다나 '어른의 칭찬'이었으니 초등학생 꼬마에겐 엄청난 거였다.ㅎㅎ


아빠도 그런 내가 귀여웠는지 처음 보는 카메라 가방을 꺼내어 그 안에 담겨있던 오래되어 보이는 필름 카메라를 보여주셨다. 그걸로 우리를 찍어주며 내게도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어쩌다 보니 나는 방과 후 활동으로 사진반에 들어가 조리개니 셔터 속도니 하는 얘기를 그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듣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열명 미만으로 쪼르르 앉아서 그런 수업을 주마다 한 번은 꼬박 들었던걸 생각하니 웃긴 일이다. ㅎㅎㅎㅎ


무튼 사촌오빠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과 친구들도 찍어주고, 그걸로 한창 유행했던 싸이월드도 열심히 했다. 어느새 나는 과 행사 때마다 전문(?) 사진 기록자가 되어있었다. 엠티며 운동회며 온갖 행사에서 사람들을 찍었다. 어떻게 보면 '공식적으로' 사진을, 사람들을 찍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사촌오빠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카메라를 돌려달라 했다. 마침 나는 과방에 들르는 시간을 줄이고 있었을 때였다. 여러 명과 어울리는 건 피곤한 거라는 걸, 그리고 내가 그걸 좋아하지 않는 단 걸 알았거든. 따라서 카메라를 들고 과 행사에 참여하는 횟수도 점점 줄고 있었다. 사진은 계속 찍었던 것 같다. 카메라 없이도 그쯤 나왔던 아이폰으로 충분했다. 휴대폰 용량의 대부분은 늘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사촌오빠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기 전,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을 외장하드로 옮겨 사진을 정리하는데 맑고 쨍한 날 찍은 사진보다 흐린 날 찍은 사진 속의 색감이 더 짙게 나온 걸 발견했다. 우연일까? 우연인지 진짜 그런 건지 확인하기엔 흐린 날 찍은 사진은 몇 안되었다. 카메라에 물은 치명적이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들고나가 맑은 날에 사진을 많이 찍었던 장소에 흐린 날에도 가서 사진을 찍고 비교해보기로 했다.


장소는 덕수궁이었다.

비가 조금 내리다 말다 하는 날이었는데, 덕분에 인적도 없었고 바닥의 흙은 질척거렸다. 그 넓은 공간을 한참을 둘러보다가 처마 아래에 앉아서 찍어둔 사진들을 확인했다. 마침 단풍이 물들어 있을 때라 하얀듯 흐린, 파란색이 없는 하늘 아래 정말로 모든 색감이 듬뿍하게 묻어 나와 담겨 있었다. 화면들을 다 확인해보고는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서도 그냥 거기 좀 더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드니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이미 바닥에 생겨있는 빗물 웅덩이에 떨어졌다. 고인 물에 비친 하늘이 흔들거렸다. 그러다 내 주변 가득한 흙냄새와 묵은 나무가 습기를 머금은 향들을 맡았다. 손에 느껴지는 나무로 만들어진 마루의 질감도 괜히 더 세세히 만져지는 것 같고.

짙어진 건 색감뿐만이 아녔던 거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게 짙어져 있었다.


아마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흐린 날을 좋아하게 된 게.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예보대로 새벽을 지나 해가 뜰 무렵부터 비가 왔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창문 밖 풍경들은 모두 젖어있었다. 얇은 빗줄기들이 창문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하늘은 하얀듯 흐렸다. 창문을 여니 흙내음이 가득했다.

끓은 물을 커피 가루가 담긴 잔에 붓고 휘저었다.

인스턴트커피 가루일 뿐인데 그 작은 잔안에서 피어난 커피 향이 온 방안에 은은하게 가득 찼다.

후드티 안에 목폴라며 패딩 조끼를 챙겨 입고 나왔다. 어제 목이 휑한 채 돌아다녔더니 일어났을 때 목이 좀 칼칼했거든.



계절이 겨울인 만큼 나뭇가지에 달린 초록 잎사귀는 없었으나, 대신에 담벼락에 끼어있는 이끼들이 푸른 색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땅도 건물도, 빗물에 젖은 모든 것들의 색감이 한층 진해져 있었다.


아까 튜브를 타기 위해 역 근처에 도착할 때쯤이었나, 익숙한 달달한 냄새를 맡았더랬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했는데 입구를 열어둔 젤리 가게에서 나는 거였다. 여길 하루에 한 번은 지나갔는데 이 냄새를 맡은 건 처음이었다. 눈에 보일리 없는 공기 입자가 내겐 보이는 것 같았다. 습기에 불어나 젤리에서 나온 향을 가득 잡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상상했다. ㅎㅎ


비는 오는 듯 내리는 듯 날씨가 애매하게 굴었다. 아무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니까. 후드티를 챙겨 입고 나간 건 잘한 일이었다. 여기 사람들처럼 그냥 후드를 쓴 채 걸었다.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 져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곳에 곧장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우유를 타 주는지 아메리카노의 옵션으로 white or black? 이라 묻더라.


안쪽 테이블이 비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테이블이 덜컹. 에휴... 휴지를 접어 낮은 쪽 테이블 다리 밑에 대었다. 직업병이라기보단 이런 걸 못 참는 성격인 거다. ㅎㅎ 그러다 보니 이렇게 해두고 나온 곳들이 유럽에도 여럿 서울에도 여럿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여럿 있다. 수평 만세 !


화장실을 가려면 카페 뒤뜰이 있는 공간을 통해 가야 했다. 칸이 한 칸이라 잠깐 기다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의 글의 주제가 생각났고 곧장 자리로 돌아와 그걸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추 쓰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제와 다르게 늦게 나왔으므로 (온전한 오전 안녕) 카페에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낮에 오늘의 글을 정리해두었기에 부담이 적었던 걸까, 예상치 못하게 멋진 공간을 발견해서 그곳에서 저녁까지 먹고 왔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다. 식사를 했던 곳에 대해서는 인스타에서 너무 호들갑을 떨어 놨기 때문에 여기선 자제해야지..


무튼 나와선 우산을 꺼내야 했다. 걷는데 비에 젖은 땅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반대로 원래 보였던 것들이 안 보이게 되기도 하고, 이렇게.



+

모처럼 집을 나설 때부터 비가 와 그걸 빌미로 이런저런 얘기를 쓰게 되었고 그게 오늘의 글이 되었다. 사진을 찍게 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쓰고 보니 ‘아 이때였구나’하고 알았다. 생각을 말이든 글이든 풀어야 나도 알 수 있다니.. 꾸준히 뭐든 써봐야 하고 뭐든 말해봐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돈도 꾸준히 벌어야 하는데.. 꾸준한 건 자신 없는데 꾸준해야 할 것들이 자꾸 늘어난다. 화이팅..


+

사진이랑 글, 그림에 시간을 쏟는 건 나의 취미 활동이다. 사진과 글은 매일 시간을 들이고 있지만, 그림은... 뭐,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틈틈이 시간을 내면 된다. 한두 시간은 훌쩍 가버리는 이 취미들이 있어 혼자의 시간도 제법 잘 보내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 취미란, '이것만큼은 잘하지 않아도 되니 스트레스받지 말 것' 이다. 이거 말고도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너무너무 넘쳐나니까. 다만 내가 가진 취미들이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만 주기를 바란달까. 욕심인가.


아, 이번 여행에서 매일 글을 쓰는 건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하다. 근데 그걸 스트레스라 안 하고, ‘텐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살면서 적당한 긴장감은 어느 정도 필요하니까. 한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올리고 있는 게 사실 나도 신기하다. 어쩌면 내 것이 아닌 체력으로 하루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못해왔던 생산적인 온전한 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가..

스스로 정한 약속을 지켜내면 내겐 뭐가 남을까. 성취감? 수십 개의 글? 아니,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된다. 근데, 다행히도, 글을 쓰기도 쓰면서 나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된다. 글을 읽는 분들이 나에 대해 알아가는 건 없을 것 같지만.. 목적 없이 어떤 주제를 떠올리고 거기에 대한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글이니 읽으시는 분들도 그냥 편하게 읽고 있길 바랄 뿐이다. (아닌가요?)

그나저나 취미를 즐기며 나에 대해 알아간다니, 곱씹을수록 멋있는 일이네. ㅎㅎㅎㅎ (아닌가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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