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d+24

by regine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층 버스 앞자리가 비어 있던 건 처음이었으니까.


버스가 나아가는 모양새를 맨 앞에서 내려다보자니 나름 잽싼 움직임과는 맞지 않는 둔탁한 휘청거림이 느껴졌다. 아슬아슬한 사다리에 올라탄 느낌이랄까. 강을 건너려 다리를 지날 땐 그나마 그게 좀 덜했다.


옆자리 꼬마가 자신의 책가방과 곰인형을 자기보다 더 앞자리 공간에 앉혀둔 게 눈에 들어왔다.



인형이 앞을 향해 앉게 해 둔 게 귀여웠다. 꼬마가 보는 시선을 곰인형과 함께 공유하기 위한 걸까. 반대로 내가 어렸을 적엔 인형들의 시선을 내 쪽으로 오게 두곤 했었다. 아, 인형이라기보단 로봇이나 공룡 모형이었다. 영화 처키를 보고선 사람 모양새를 가진 인형들을 무서워해서 친구들의 바비 인형을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게 매일의 과제이자 도전이었다...


무튼 버스를 타고 삼십 분이 넘게 갔던 건, 기대했던 갤러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너무 했던 걸까,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

보통 갤러리들은 같은 지역에 모여있기 마련인데, 여긴 혼자 똑 떨어져 있던 곳이라 나와서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결국 또다시 삼십 분여 정도를 버스로 움직여야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골목에 잘못 들어섰는데 마침 그곳이 이 동네의 가구 거리인 듯했다. 이곳저곳 들어가 봤는데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다시 정신 차리고 원래 가던 경로로 향하다 카페 앞에서 멈췄다. 길을 꽤 돌아온 턱에 정류장까지는 십분 정도 걸어가야 했기에, 테이크 아웃 주문 줄에 섰다. 메뉴에 피콜로가 있어 그걸 시켰다. 마침 다들 오후 커피를 찾을 시간대였기에 줄을 좀 서야 했다. 커피를 받아 들기까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십분?

나와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십 분 만에 어디서 비구름들이 몰려온 걸까... 예보엔 비 소식이 전혀 없었기에 비를 맞을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집에서 나올 쯤에 하늘은 이렇게 정말 맑았거든.


하는 수 없이 카페 외부 어닝이 쳐져 있는 앉을 공간에 잠시 머물러 있기로 했다. 구름을 보니 지나가는 소나기인 것도 같았다. 내가 앉은 쪽에서 하나 더 바깥쪽 테이블엔 누군가가 비워 둔 커피 잔이 있었다. 커피 받침엔 담배꽁초 두 개. 그리고 커피 잔이 하나 더 있었다.

빗줄기가 워낙 세서 그 테이블의 한쪽엔 이미 빗방울들이 많이 묻어 있었다.


라떼도 플랫화이트도 아닌 피콜로를 시켰던 탓일까, 커피를 다 마시는 시간까지도 빗줄기는 멈추지를 않았다. 애꿎은 빈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삼분. 에라 모르겠다. 아까 들렀던 갤러리에서 챙겨둔 브로셔가 있어 그걸로 머리를 가리고 빗속으로 들어가 걸었다. 다행히 정류장엔 지붕이 있는 스탠드가 있어 그 아래에서 코트에 묻은 빗방울을 털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도착 예정은 십분. 계속 늦어진다는 알람이 떴다. 괜찮아 그래도 비는 피할 수 있으니까. 버스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 있었다. 그런데 저어기, 흐린 구름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빼꼼 보이다가 점차 그 영역을 넓혔다.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윽고 버스가 와 올라타 자리에 앉았는데, 몸이 약간 이상했다. 코가 막히고 으슬으슬했다. 에이 설마, 잠깐 비 맞았다고 이러는 건가?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었다. 여행 와서는 매일매일을 원래 체력을 넘어선 수준으로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도 십오 분이면 도착하니까. 도착했을 때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곳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해야겠다 싶었다. 오늘을 제외하고 여태 돌아다닌 일정들을 쭉 봤을 때 한 번도 몸살이 안 난 게 되려 신기한 상태였으니까.


근데, 응...?



도착한 곳은 다음 전시를 위해 아예 갤러리가 폐쇄되어 있었다. 내년 전시 때 보자는 인사말이 출력된 종이 달랑 한 장 있었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는 몰라도 오늘 여는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진지는 항상 체크를 해두었었기에 이 곳이 지금 전시 준비 중이라는 건 먼저 알고 있었다. 그걸 잊고는 비가 내리는 상황에 근처 가까운 갤러리로 가는 것만 생각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좀 전에 마음먹었던 것과 다르게 근처 한 곳을 더 들러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루를 이렇게 마감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긴 거였다. 또 버스를 타야 했다. 길에 빗물이 남아있어서인지 예상 도착 시간에서 버스는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그래도 비는 이제 안 올 것 같으니까.



이번엔 이층 계단으로 올라갈 힘도 없었다. 그래서 운전사 뒷자리에 탔다. 서울의 버스와 다르게 내가 앉은자리는 시야가 꽉 막혀 있었다. 운전석 뒤편에 겨우 마련된 자리였달까. 바깥을 못 보니 그저 불투명해진 유리 넘어 운전사의 실루엣만 보다가 내렸다. 원래 불투명한 유리인지 아님 습기가 차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으스스해진 기운을 없애보려 몸을 바짝 움츠리기에 바빴거든.


갤러리 옷 보관함에 코트를 벗어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추도 푸르지 않은 채로 티켓을 들고 곧장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내부는 따뜻했다. 근데 하필 전시가...


ㅎㅎㅎㅎㅎㅎㅎㅎ


컨디션이 최고조에 왔을 거래도 이 사람의 작품 앞에선 정신이 없었을 텐데, 몸 상태가 안 좋은 나는 오죽했을까... 눈이고 머리고 핑핑 돌았다. 게다가 하필 전시를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엔 과한 패턴들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품과 그들이 겹치니 관람은 점점 힘들어질 뿐이었다..



다행히 안쪽으로 들어가니 메인에 있던 작품들을 그리기 전의 것들이 있었다. 휴. 이곳에선 머리가 좀 차분해졌다. 적어도 어지럽진 않았으니까. 몇 장 안 걸려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꽤 있었다.


물론 내 컨디션이 별로 였던 것도 한몫할 테지만, 이런 작가들, 그러니까 본인만의 독특하고 특징적인 화풍으로 유명해졌을 이런 사람들의 전시를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있다. '불편함'.

그들의 예전 스케치나 포트폴리오들을 찾아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달까. 그걸 처음 느낀 건 살바도르 달리였다. 그가 그렸으리라 상상도 못 했던 작품들을 보는데 (하늘색, 흰색 바탕에 빨간 실선이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연작이 꽤 되었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더랬다.

그런 그림들을 쭉 보고서나서야 달리가 천재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이 들더라. 바르셀로나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에 있는, 그가 직접 지은 본인의 뮤지엄에서 본 것이었다. 지하엔 그의 관도 있다.. ㅎㅎ


아까 얘기한 불편함에 대해선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프란시스 베이컨을 보고서도 그랬고, 에드워드 호크니도 그랬다는 거다. 둘 다 퐁피두에서 열렸던 걸 봤는데, 호크니 전엔 그의 대표작 외 다양한 스케치들이 있었고 역시나 그게 더 맘에 들었다. 작은 그림들이 작은 액자에 연달아 있어 보기엔 더 어려웠음에도 눈에 더 잘 들어왔었고...



사실 처음부터 내 눈에 계속 밟혔던 건 전시장 내부 계단과 벽을 구성하는 것의 소재였다. 콘크리트 같은데 나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결이 있었고 폭도 꼭 나무판자 크기 정도였거든.

손을 대보았는데 나무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전혀 없었다. 거푸집으로 결이 깊은 나무를 쓴 모양이었다. 늘 안도 타다오식의 매끈한 처리만 봐왔으니 이건 또 처음 보는 거라 신기했다. 원목 무늬가 깊게 새겨진 콘크리트란, 원목 결이 주는 시각적인 편안함이 있었고 견고하되 유연했고 묵직했다. 가로에서 세로로, 좌에서 우로 이어진 결들은 사실 아까의 어지러운 작품과 다르지 않았지만 각도나 두께를 계산하지 않은 무늬라는 게 큰 차이점이었다. 계산되지 않은 쪽이 편안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 이제 진짜 집으로 가자 하고 경로를 검색했다. 구글맵은 강을 건너 튜브를 타라고 제안을 해왔다. 아니면 라임이나 우버를 타라고. ㅎㅎㅎㅎ ‘오늘 쉽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며 다리로 가는데, 그 아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더라. 뱅쇼라도 한잔 들고 건널 생각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이걸 발견했다.



‘트뤼플 버거’. 트뤼플 마요네즈를 썼다며 그렇게 간판을 붙여놨더라. 계산을 맡은 직원은 내가 잠시 멈칫 한 걸 봤는지 웃으며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로 보내온 미소가 세상 사람 좋은 미소였던 탓에 어느새 나는 그 앞으로 더 가까이가 ‘트뤼플 버거 한 개’를 주문하고 있었다... 빵도 굽고 패티도 바로 구워내느라 조금 기다려야 했다. 아직 나가지 않은 주문들도 있어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버거를 만드는 과정을 봤다. 먼저 버거의 바닥이 될 번엔 무화과 잼을 바르고 튀긴 양파 조각들을 올렸고, 뚜껑이 될 번에는 트뤼플 마요네즈로 보이는 걸 촘촘하게 뿌린 뒤 치즈가 올려진 패티를 올려 합체.



주문이 잠시 뜸할 때는 계산 담당 직원이 감자튀김 파트를 거들었다. 둘의 합이 꽤나 좋아 보여서 맛이 더 기대되었다. 뱅쇼는 머릿속에서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ㅎㅎ 그리고 받아 든 버거는 지금 내 몸 컨디션을 잊게 할 ㅎㅎㅎ 정도의 맛이었다. (길거리 음식 좋아함) (햄버거 좋아함)

속이 든든해져서인지 다리는 금방 건넜고, 튜브도 갈아타야 했지만 괜찮았다.



그때까진 정말 괜찮아진 줄 알았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콧물도 나와 상태가 영 말이 아녔다.


씻고 컵라면을 먹었다. 영혼의 닭고기 수프 같은 컵라면... 한인마트도 아닌 세인즈버리 로컬에서 발견한 거였다. 개당 90p. 혼자서 그걸 3개나 집어온 거였다. 망설임 없이 여러 개 담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던걸 나는 느꼈지...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건 늘 싱겁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칼칼하니 맛있게 먹었다. 한 개는 지난주에 먹었고, 오늘도 먹었으니 이제 하나 남았네...


아, 집에 오는 길에 달을 보니 유난히 밝고 둥글었다. 엊그제 뜬 달을 보고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쯤 보름달이 뜨겠거니 했는데 아녔다. 달이 기울고 차고를 몇백 번은 봐왔을 건데 그거 하나 짐작 못한다니 시무룩해졌다. 저게 보름달인지는 모르겠지만ㅎㅎ



무튼 집에선 달이 보이지 않을까 봐, 집으로 가는 도중에 몇 번을 멈춰서 달을 찍었다. 근데 집에 도착하니!! 뜨든.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정면은 아니었지만, 그 빛이 비스듬히 빗겨 내려오는 걸 보며 시무룩한 기분은 또 금세 날아갔더랬지.ㅎㅎ 이럴 때 보면 정말 단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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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글은 커피 대신에 테라플루를 물에 풀어 그걸 마시며 쓰기 시작했다. 약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해 몸살이 나면 우선 잠을 자는 편인데, 당장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일 땐 어쩔 수 없이 약을 먹는다. 퇴근시간이 한창 남았을 때와 지금처럼 여행 중일 때가 바로 그 상황에 속하겠다. 아프면 안 되는 상황이랄까. 처음엔 맘 놓고 아프지도 못하는 게 서럽기도 했는데, 결국 스스로 컨디션 관리를 못했기 때문이니 그런 감정은 되려 독이 될 뿐이었다. ‘아프면 자기만 손해’라고 엄마에게 늘 듣지 않았던가.. 다행히도, 약을 잘 먹는 편이 아니다 보니 먹으면 약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편이다. 덕분에 지금은 목으로 들어간 테라 플루가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글을 올리고 누우면 곧장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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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오는 상황들이 참 변화무쌍했던 하루였다. 제목을 정하지 않고 글을 쓴 건 처음이었는데, 써 내려가다 보니 떠오르더라.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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