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귀국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한 손으로 세어볼 수 있었다. 그랬다. 정말 며칠 안 남았다. ㅎㅎ
엊그제와 어제, 거의 이틀 정도의 시간은 몸살을 만나 앓았고 또 그걸 이겨내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덧나지 말자 하고는 가만히 누워있는데 그렇게 보내는 새벽도 참 오랜만이었다. 누워서 지나온 날들을 떠올려봤다.
떠나오기 전엔 막연하기만 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직접 부딪쳐보니 구체화된 것들도 있었고, 정리가 안된 채로 뒹구는 것들도 있었다. 정리해야 할 것들을 굳이 당장 정리해야겠다는 마음보단, 구체화된 것들은 뭐가 남았나 생각해 봤더랬다.
아무래도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게 있다면, 전시를 보는 방법이었다. 이전과 조금 달라지고 있었다.
영향을 준 건 파리에서 각각 함께했던 S와 H였다. 이 둘은 순차적으로 왔다가 순차적으로 떠났지만, 내겐 그들의 ‘방법’들이 남았다. 작품을 대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었듯이, 나와 다른 S의 것이 있었고 또 H도 그녀만의 것이 있었다.
S의 방법은 설명을 먼저 읽어 본 후에야 작품을 대하는 것이었고, 작품의 의도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 했던 건 H의 방법이었다.
나는 설명을 읽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해버리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제목 읽는 것도 겨우 맘에 드는 것만 ㅎㅎ 작품보단 공간이나 거기에 머무는 사람들에 집중하는 것도 있었다. 그게 나의 방법이었던 거다.
따라서 전시장에 같이 가고 같은 작품을 봤지만 집중하는 포인트,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 기억하는 내용이 달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틈이 생겨 이런저런 얘기를 할 때 그런 다른 부분들이 느껴지는 순간이 재밌었더랬다. S가 그녀의 방식이 아닌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할 때 반가웠음과 동시에 나 역시 그녀처럼 방법을 확장해보면 어떨까 하여 시도해보고 있었지만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설명을 읽는데 난데없는 철자의 기울임 같은 작은 실수들이 더 눈에 보였거든... 외국어다 보니 문맥의 오류까지 발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만 아마 한국어였으면 그런 걸로까지 꽤나 갸우뚱하고 있었을 거 같다. 뭐 설명이야 그렇다 치고, 제목만큼은 꼬박 챙겨 읽었다. 덕분에 원래 내 방식대로였으면 못 알아차렸을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 역시 재밌는 일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정말 다른 게 눈에 보였다. 원래 일차원적으로만 대하던 게 보다 다차원적으로 느껴진달까.
특히나 런던에서는 혼자서 전시를 보고 혼자서 감상을 나눠야 했다. 여기서 감상을 나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다른 생각을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그녀들과 나눴던 대화들을 토대로 ‘S라면 혹은 H라면 여기서 무슨 말을 했을까? 뭘 봤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 보다 보면, 생각을 나눈다는 게 상대가 없어도 이렇게나마 해볼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혼자서 해오던 방법 외에 다른 두 명의 것까지 챙기려니 작품 하나를 두고 세 명분의 머리가 움직여야 했다. 모든 전시의 모든 작품을 이렇게 대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맘에 드는 작품을 몇 개 골라서.
근데 이곳 런던..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원래 전시를 보는 방법만 가지고 있었다면 쉬웠을까? 우선 전시의 설명은 둘째치고 제목, 제목이 문제였다. 그놈의 ‘untitled’..... 제목 없음의 노다지였다 !!!
그러다 보니 작품을 먼저 보고 호기심에 제목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untitled’가 나오면 처음엔 음.. 두 번째엔 음.... 세 번째엔 헛웃음이 나왔다. 작가야 나보고 어쩌라고 !
그렇다고 H처럼 따로 인터넷 검색을 할 정도의 부지런을 떠는 방향으론 가진 않았다. 각자의 방법이 생기게 된 건 다 이유가 있는 걸까..
원래 아무 색도 식별하지 못하던 사람이 노란색과 파란색을 구분하게 될 줄 알자, 이젠 그 외의 색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된 셈이랄까...
배운 버릇 남 못준다고, 원래는 제목 없어도 ‘응~ 그럼 더 내 방식대로’ 해오던 게 이젠 어려웠다.. 두 명이 남기고 간 전시 보는 방법을 시도해본 건 내가 못 보던 것들을 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는 또 흘러가지 않더라.. 뇌야 기능적으로 움직여줘..
이런 회의감을 느낄 즈음이었다. 이런 걸 느낀다는 걸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몸살 때문이었지만, (구체화된 걸 떠올려 보자 했는데 이런 생각을 구체화해버렸다) 가만히 집에만 있던 덕분에 ‘제목 없음’들을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
컨디션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다만 그래도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움직였다. 오늘은 가볍게 갤러리 한 곳만 들렀는데 다행히 그곳에선 모든 작품에 제목이 있었다ㅎㅎㅎㅎㅎㅎ ‘untitled’ 말고 진짜 제목 말이지 !! 제목이 없더라도 내 식대로 즐겨보자 였는데.. 심지어 제목이 있는 게 이토록 반가울 일인가 싶더라.
제목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갤러리도 그 안의 전시 자체도 좋았다. 건물 두 개에 나뉘어 있는 전시공간도 신기했고. 보통 하나의 갤러리에서 여러 개의 전시가 있으면 조금 분산스러웠었는데 장소적인 구분 자체도 그 특징이 확실했어서, 두 작가의 것을 각각의 새로운 것을 볼 상태로 집중해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틀 쉰 탓일 수도 있고.. 아무렴 어때 !
갤러리에서 나와 다시 짚어보니 작품들에 제목이 있어 즐긴 게 아니었으며, 제목 없음이 제목임을 탓할 일이 아녔단 걸 그제야 알았다. 그것 때문에 전시를 되려 잘 못 즐기고 있나 하던 찰나였건만.. 그런 생각 없이 그저 집중하고 즐기고 있는 나만 남아있었다.
이틀 밤새에 구체화되었던 회의감이 이렇게 날아갈 수 있다니. 애초에 전시 방법에서의 정답이란 건 없었다. 다양한 방법들만 있을 뿐. 그러니까 'untitled'는 아무 죄가 없는 거였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듯, 제목 없음도 제목이 될 수 있음을.
회의감 안녕. 근데 또 하루 만에 안녕을 고하는 건 조금 이른 것 같으니... 내일 아니면 내일모레 만나게 될 ‘untitled’의 제목을 가진 작품을 만나서 하면 되려나. ㅎㅎ
회의감 안녕 (bye) untitled 안녕 (hi).
공식적인(?) 진짜 안녕은 아직이지만, 벌써부터 후련하고 진심으로 반갑다. ㅎㅎㅎ
+
오전에는 B가 알려준 빈티지 그릇 시장에 갔었다. 일정상 가려면 오늘 가야만 했기에, 날씨가 궂으면 좁은 골목 돌아다니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맑았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 오밀조밀 구경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내어놓아진 컵이나 그릇만큼이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들어갔던 골목으로 다시 돌아 나오면서 구경이 끝나 커피나 마실까 했더니, 지도에 미리 표시해둔 곳은 골목 안에 있던 곳이었다. 돌아가기엔 입구에 보이는 카페도 나쁘지 않아 보여 들어가 플랫화이트를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시켰는데 한참이 지나도 내가 가져온 번호판과 커피를 바꿔가질 않길래 가봤더니, 아예 주문이 안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된 거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고 움직여야겠다 싶어 말을 건 김에 샌드위치도 시켰다. 그러자 내게 주문이 누락되어 미안하니 샌드위치는 테이크 아웃 가격으로 계산하고 (대부분 모든 카페가 테이크 아웃과 먹고 가는 가격이 달랐다. 먹고 가는 게 조금 더 비쌈), 곁에 올릴 샐러드를 추가로 선택해보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샐러드까지 올라간 접시를 받아 다시 자리에 앉고 보니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정신없는 점심 러시 타임이었고, 되려 바쁘지 않은 내가 재촉을 안 한 탓에 늦어짐에 보탬이 되었을 건데 내가 시킨 커피 메뉴마저 기억해주고 있었다니.
사실, 고백하자면 그런 씀씀이가 반갑기도 했다. 역시 돌고 도는구나! 하고 ㅎㅎ
영업시간이 끝나고도 쇼룸에 불을 다 꺼두지 않고 머물렀던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냥 들어오시는 분들이 아주 가끔 계셨는데, 처음 방문하거나, 커피를 마실 겸 찾아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운영시간을 설명하고는 서랍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들에게 주면서 '오늘은 어렵지만, 다음에 운영시간 안에!(별표) 오시게 되면 이거 들고 오세요, 여기 적어둔 대로 커피 조금 할인해 드릴게요’ 라며 돌려보낸 적이 몇 번 있었다. 우연히 들른 것이든 아니든 일단 이곳에 찾아와 준 게 고마웠고, 그러다 보니 그냥 돌려보내야 했던 미안함이 괜히 더 크게 느껴졌달까.
물론 그렇게 전해준 그 명함을 들고서 그중에 몇 명이나 다시 찾아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접시를 깨끗이 비워 먹은 건 그 직원이 써준 마음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먹으니 속이 더 든든한 느낌이었다.
다음 장소를 검색해보니 걸어서 삼십 분 내외로 시간이 뜨길래 소화도 시킬 겸 걸었고 그러다 또 예상치 못하게 너무 예쁜 운하를 만났지. 그다음 장소였던 갤러리에도 좋았던 건 위에 이미 적었고.
몸이 한결 가벼워져서인지 오전부터 기분이 좋았다만, 곱씹어보니 다 좋은 하루였다. 뭐,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단 그런 하루를 보냈다는 게 중요한 일이겠다.
그러고 보면 작은 일로 언짢아지는 건 참 쉬운데, 또 되려 작은 행복을 크게 느끼게 되는 경험은 그 기회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게 어려운 만큼 그 기억이 오래가는 거겠지.
또, 좋은 기억만 가득한 하루를 만나는 건 당장엔 어려워 보이지만, 오늘 저녁-내일 아침-내일 낮 이렇게 나눠서 생각해 본다면 그새 모여진 작지만 좋은 기억들이 쌓여 하루를 만들고 있겠다.
몸이 건강해지니 회의감이 다녀간 자리에서 행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ㅎㅎㅎ
역시 건강이 최고다..
d+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