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가이드

d+29

by regine

기차 출발 시간인 12시 10분에 맞춰 서둘러야 했던 오전이었다.

기차표를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하고, 당일 서두를게 걱정돼 어제 미리 기차역에 가 예매한 티켓을 찾아 둔 건 잘한 일이었다. 튜브를 한 번 갈아타야 했지만 어제 한번 가봤던 길이라 수월할 거였고.

다만 알람을 듣고서도 잘 일어나지 못한 내 몸이 문제였다. 이걸 걱정해 어제저녁에도 일찍이 누웠던 건데도 그랬다. 마지막 알람마저 무시한다면 아침으로 생각했던 커피와 빵은 포기해야 했다. 그럴 순 없어 몸을 겨우 일으켰다.

그리곤 서둘러서 집 앞 크루아상 맛집 카페에 가서 빵과 커피를 샀다. 빵은 우선 가방에 넣었고 커피를 마시며 역으로 향했다.



저번에 플랫화이트에 실패했기에 에스프레소 더블을 시켰는데 너무 맛있었다. 우유 들어 간 커피가 잘못된 거였나, 앞으론 오늘 주문한 거대로 시켜야겠네, 그래 봤자 이삼일 남았는데도 이런 생각을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발걸음을 재촉해서였는지 튜브를 기다리는 데 벌써 더웠다. 하필 도착해야 할 튜브는 지연되고 있었다. 더 더워졌다.

갈아타야 할 튜브도 지연. 결국 패딩 안에 입은 셔츠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엊그제 가벼운 백팩을 하나 샀었는데 말도 안 되게 편했다. 늘 나의 오른쪽 어깨만 짊어지던 무게를 왼쪽 어깨도 거드느라 그랬겠지만, 이미 들어있는 짐에 빵에 옷이 더 들어가도 느껴지는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튼 그러다 보니 튜브를 내려야 했고 기차역으로 가려면 연결 통로를 통해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이렇게 길었나 이 길이. 시간을 봤다. 11:57.

커피를 마신 탓에 화장실도 잠깐 들러야 하겠는데 화장실 표시가 안보였다. 어쩌지 기차에서 갈까? 그러다 바로 옆에서 화장실을 찾았다. 유료였다. 입장에 필요한 금액은 30p. 동전이 몇 개 안 남아 집에 두고선 카드만 들고 다니고 있어서 내겐 동전이 아예 없던 터였다. 고민하고 있기엔 나한테 주어진 시간도 얼마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몸을 쭈그려 가드를 통과했다. 화장실 입구에 있는 가드레일에 그 동전을 넣으면 지하철 개찰구처럼 가드가 돌아가는 무인 구조였다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좀 과감하긴 했네..


열차는 생각보다 작았다. 티켓엔 자리 번호가 없었는데, 열차 내부에도 자리 번호는 없었다. 맘에 드는 자리 찾아 앉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거의 마지막에 탑승한 나에게 자리 선택권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선택권은 커녕 아예 빈자리가 없어 보였다. 내가 서성이고 있으니 누가 내 패딩을 잡았다. 헉. 순간적으로 가방을 품으로 돌리고선 고갤 돌렸다. 자기 옆에 자리가 있으니 앉으라는 아주머니의 손길이었다. 그런 손길을 굉장히 적대적인 눈길로 답한 게 머쓱해 고맙다고 하고선 눈인사를 건넸다. 친절한 아주머니도 눈인사로 대답해주었다.

앉은자리가 창가 쪽이었어서 그쪽으로 몸을 기대 숨을 돌렸다. 쉽게 가라앉지가 않았다. 급하게 뛰어온 것, 그리고 손길에 놀란 것 때문이었다. 더운 것도 가시질 않아 결국 패딩마저 벗었다. 기차가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12:14.



차창 풍경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까지 기차를 타야 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아직 가봐야 할 곳도 많았다. 어제 갔던 테이트에선 보려던 전시가 인원 제한이 마감되어 결국 다른 전시를 봤었기에 그곳도 다시 가야 했고.

내가 가는 곳은 런던에서는 기차를 타고 약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기차에서만 도합 네 시간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다녀오는 일정을 넣었던 건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이 질문에 문득 미슐랭 가이드가 생각났다.

미슐랭의 레드 라인에서 별 세 개면 ‘요리를 맛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도 아깝지 않은 식당’ 두 개면 ‘요리를 맛보기 위해 멀리 찾아갈 만한 식당’ 한 개면 ‘요리가 특별히 훌륭한 식당’이라 소개를 하지 않던가. 그걸로 치면 내가 가볼 곳은 ‘방문을 위해 멀리 찾아가 볼 만한 곳’이었던 거다.


사실 처음부터 생각해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마 처음으로 갔었겠다 ㅎㅎ 엊그제 마지막 갤러리를 나오면서 시간이 살짝 애매해 어딜 가볼까 하다가 문득, vitsoe가 영국 브랜드란 게 생각났다.

어떤 걸 만드는 곳인지만 대충 알고 있던 곳인데, 브랜드에 대해 좀 더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는 올해 봤던 ‘디터 람스’라는 영화에서였다.

디터 람스, 제목으로 붙은 건 사람의 이름인데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다. 독일 태생인 그를 내세운 브랜드로 vitsoe가 소개되었었다.


지도로 찾아보니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쇼룸이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큰 편이었지만, 워낙에 제품수를 다양하게 두진 않는 브랜드이기도 했고 직원들도 퇴근 시간 삼십 분을 남기고 괜히 바빠 보여 말을 걸기도 상황이 좀 그랬던지.. 혼자 휑 둘러보고 나왔었다.



다녀왔지만 다녀오지 않은 느낌이 들어 다시 찾아보니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본사가 있었다. 오픈 시간 중 오후 시간 몇 시간은 한편에 마련된 쇼룸에 방문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 영화에 소개된 건물이 바로 그곳이었다. 영화에서 이 건물을 짓는 것을 상당 시간을 들여 보여주었었고, 나 역시도 제일 흥미롭게 기억하는 부분이었다. 영화에서 보인 내용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자면 : 건물은 다 목재로 지었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걸 신경 썼으며, 공장 겸 본사로 공간을 나눠 쓰되 카페테리아에도 꽤나 공을 들였다는 거. 짓는 과정과 지어진 후 실제 사용되는 모습까지도 나왔었는데 여기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공장 가운데 부분을 전문 댄서들이 연습실로 활용하게 두었다는 점이었다. 공간을 다 쓰지 않아도 되어 함께 공유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부분에 대한 건 정확한 기억이 아니니 이걸 위해 영화를 한 번 더 볼 필요가 있겠다.


흥미를 가졌던 공간에 직접 가볼 수 있다니.

안 가볼 이유가 없었다.

당장에 그곳으로 가는 경로를 찾아봤다. 기차를 타고 가야 했다. 왕복 네 시간, 아니 말이 네 시간이지 사실상 거의 하루를 다 써야 했다. 남아있는 일정 중 하루의 일정을 통째로 계획하는 데에는 불과 삼십여분이 채 안 걸렸다. 쇼룸을 다녀온 게 토요일 저녁이었어서, 공장 방문이 가능한 가장 빠른 일정은 월요일이었고, 그게 오늘이었던 거다.



차창밖 풍경은 처음엔 건물로 가득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드넓은 초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흐렸던 하늘에도 해가 나고 있었다.

그러다 차창에 앞좌석 사람이 책을 읽는 게 비쳐 보였다. 그제야 나도 책을 챙겨 왔다는 게 생각났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읽는데 자꾸 눈이 책이 아닌 차창으로 향했다. 계속 도시에서 지내다 보면 이런 넓은 평야는 볼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낯설었고 내겐 귀한 거였다. 다만 기차가 워낙에 빨리 가고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했다. 사진도 찍어 봤는데 이렇게 계속 가까이에 있는 나무가 흐리게 빗겨서만 찍혔다. 결국 책을 꺼내어 몇 장이라도 봤다는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읽어진 부분이 펼쳐진걸 사진을 찍고는 책을 덮었다. ㅋㅋㅋ



도착해서는 조금 걸어야 했는데 금방 비가 왔었는지 ‘모든 게 짙어져 있는’ 순간들 속에서 걸을 수 있었다. 숲과 흙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도 그럴게 내가 지나온 평원들로 이루어진 곳일 거였다.



멀찍이 vitsoe의 간판과 그 건물이 보였다. 하나의 일자 형태로 길게 늘어져있었고, 영화 속에서 봤던 자연광을 위한 천장 경사면이 삐쭉삐쭉 올라와있는 게 보였다.



벨을 누르니 직원이 나와 맞이해 주었는데, 약간 표정이 ㅎㅎ ‘반가워, 근데 여긴 왜..?’라는 눈빛이 가득했다. ㅋㅋㅋㅋㅋ 여기서 나는 일차로 당황을 했지.


- 영화를 봤어요, 방문이 가능하다길래 왔는데 구경을 해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 근데 사실 쇼룸이란 곳은 매우 작아 네가 들어온 입구와 눈 앞에 보이는 이게 전부야..’


그녀의 얼굴에 들었던 의혹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어있었다.


건물들이 컨테이너를 여러 개 붙여놓은 형태라고 치면, 그녀가 가리킨 곳은 그중 한 컨테이너뿐이었다. 그것도 내가 막 지나온 입구가 포함된.

이차로 당황. 그녀는 그런 내 눈 빛을 읽고는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다는 듯이 제품 설명을 했다.


'이건 우리 선반 시리즈고, 이건 소파 시리즈들이야. 그리고 이건...'


음 다 아는 내용이었다.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잠자코서 들었던 건, 그녀가 좋은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 설명 감사해요, 그럼 저 편하게 둘러볼게요 ;)


이미 런던 시내의 쇼룸에서 비슷한 구성들을 다 보고 온 터였지만 갑작스레 방문객을 맞이해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일단 달래야겠어서 컨테이너 한 개 남짓한 공간의 제품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런데 눈길이 자꾸 옆으로 샜다. 옆 컨테이너 공간 (컨테이너 아니고 나무로만 만든.. 공간인데 이게 설명하기에 좀 편해서 ㅎㅎ 계속 컨테이너라는 표현을 쓸까 한다. 공간 구분에 관한 단위? 정도로 읽어주시면 되겠다.)에서는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해주고는 하던 데로 소파 테이블을 조립하고 있었다.


날 맞이해준 직원의 이름은 M. 사실 이름은 나중에 나가면서 내가 먼저 내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청했고 ‘오, 미안!’하며 내게 그녀의 이름을 알려주었더랬다.

그녀는 내가 잘 둘러보고 있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패브릭 가방을 들고 내게 왔다. 그 안에는 브로셔들이 가득했다.


‘혹시, 이거라도 주면 어떨까 해서’

- 우와 감사해요, 그럼 저 저기 앉아서 이것 좀 읽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리곤 내가 쇼룸으로 마련된 공간 외에 옆 작업 공간 쪽을 쳐다본 단 것도 봤는지 그녀가 덧붙였다.


'옆 컨테이너로는 넘어가 볼 수 없지만, 원한다면 사진은 찍어도 좋아, 상업적인 사용 안 한다는 조건으로 ;) ‘

- 그럼요 !! 고마워요 !



그래서 냉큼 눈으로만 담던 옆 공간을 사진으로도 담았다. 그리곤 안쪽으로 돌아와 소파가 아닌 스툴이 있어 그곳에 앉아 M이 가져다준 브로셔들을 살펴봤다.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또 한 번 내 쪽으로 건너왔다. 작은 브로셔를 건네주러 온 거였다.


'아 이걸 찾았는데 이건 네가 지금 와있는 공간에 대한 내용이 적힌 거야'


다른 브로셔는 디터 람스에 대한 거나 그와 디자인해서 나온 vitsoe의 제품에 관한 것들이었다. 심지어 다른 회사인 braun의 제품에 관한 것도 있고.


그녀가 새로 건네준 걸 펼치다 발견한 건 영화 속에서 보던 카페테리아와 그 옆에 또 다르게 vitsoe의 제품들로 꾸며진 라운지(?) 같은 공간에 관한 것이었다. 브로셔에선 그 공간을 라이브러리라 칭하고 있었다. 여기도 직접 보고 싶은데... 내게 주어진 건 입구가 바로 보이는 이 컨테이너 한 공간뿐이란 게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옆에서 작업하는 것도 볼 수 있으니 괜찮... 아니, 사실 안 괜찮았다... ㅋㅋㅋㅋ 그래서 용기를 냈다. 입구 바로 앞에 그녀의 공간에서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 저기... 자꾸 방해해서 죄송해요, 근데 혹시 이 브로셔 사진 속에 나온 공간에도 제가 가볼 수 있을까요...?

‘음.. 어려울 것 같은데.. 잠깐만’


그러더니 자리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히 불편한 상황을 만든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차마 그녀가 전화하는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웃으면서.


네가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아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동료를 불렀고, 오분 뒤에 본인이 직접 나를 ‘그 브로셔 사진 속 장소’에 데려다준다고.

M... 그녀는 최고의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카페테리아는 제일 반대편 컨테이너 쪽에 있기에 이곳을 옆 컨테이너들을 곧장 지나가 봐야 했는데, 덕분에 오가며 건물 전체를 둘러보게 된 셈이었다.

아까 내가 본 게 조립 공간이었다면 포장을 하는 공간 그리고 사무실 공간이 보였고 (눈에 보이는 순서대로 ) 갑자기 검은 커튼이 보였다. 사진은 반대로 돌아 나오는 길에 '안에는 촬영 금지니까요' 하며 찍은 거다 ㅎㅎ



그녀가 천막을 열어주며 이 공간은 촬영이 안된다 말하길래 뭔가 했더니, 영화 속에서 본 그 풍경이 있었다. 컨테이너 하나를 암막 커튼으로 둘러둔 그곳에는 조명과 노래와 댄서들이 있었다. 쇼룸이 있던 공간에서도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작업을 위해 켜 둔 노래인가 했더니 그게 여기서 나오는 거였다. 우와...

비슷한 공간은 입구 옆 공간에도 있었는데, 그곳은 문이 닫혀 있어 창문을 통해서만 봤는데 벽에 자전거가 여러 개와 공구가 달린 걸 보아 바이크 샵 같았다. 이런 식으로 업무 공간을 나눠 쓸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샵인 샵 개념의 다른 버전이라 볼 수 있는 걸까? 무튼 '우와'의 연속이었다...


암막 커튼을 지나니 포장한 제품을 쌓아둔 공간이 있었고, 저 끝에, 카페테리아와 라이브러리 공간이 보였다.



카페테리아는 점심시간을 끝내고 마무리 청소를 하고 있는 크루들이 있었다. 지나온 공간들에서 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들 나와 가벼운 눈인사를 해주었고, M은 그중 한 분을 내게 소개했다. ‘이분은 어쩌면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분이야, 우리의 셰프! ‘ ㅋㅋㅋㅋ

그리곤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주면서도 공간에 대한 작은 코멘트들과 ‘이 부분은 네가 꼭 보았으면 좋겠어’라며 내가 놓쳤을 부분들을 짚어주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다시 건물을 통과할 때는 천장 경사면에 적힌 번호에 대한 설명과 에피소드들도 들려주었고 다시 포장된 제품들을 쌓아둔 곳을 지날 때에는 한국에서도 주문이 꽤 많이 오는 편이라고 했다. 아무렴 좋은 건 참 잘 찾는 한국 소비자들 아니겠는가. ㅋㅋㅋㅋ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게 이곳을 보기 위해 이 지역에 온 거냐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고맙다는 말도 전했다.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고 나도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곤 아까 말한 대로 그제야 내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청했고 그녀도 이름과 명함을 주며 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 저런 말을 많이 해본 사람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진심이 들어갔을 때와 아닐 때의 작은 뉘앙스의 차이를. 내가 느낀 건 진심이었는데 그녀가 전해주고자 했던 마음도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공간도 공간이었지만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을 만나 더 좋았다. 브뤼셀에서 만난 사람들도 생각났고, 파리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생각났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사람일까. 기억은 될만할지는 모를 일이다만 ㅎㅎㅎㅎ



시간을 보니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진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오다가 봤던 카페를 가볼까 했는데 내가 나온 건물 바로 맞은편에 큰 마트가 있었다.

그럼 뭐다? 당연히 마트 구경인 거다 !!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입구에 코인 세탁기가 있던 거. 마트의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넓은 주차장을 보니 일주일치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주 고객일 거고, 그만치 장을 보려면 삼십 분 이상은 마트에 머물러야 할 건데 기발한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내부에 선물 포장 코너가 따로 있어 그것만 전담하는 직원이 있단 거. ㅎㅎㅎ 편지지를 위한 전문 샵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편지를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을 떠올리면, 편지와 더불어 선물도 자주 주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었으니 그걸 전담하는 직원이 두 명이나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거의 다 되어있었다. 기차에서 마실 물을 계산하려 줄을 섰다.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인 계산대는 이곳에는 없었다. 툭. 누가 가방을 쳤다.

나를 친 건 사람이 아니고 카트였다. 뒤를 돌아보니 카트엔 잭다니엘이 한 병 달랑 담겨 있었다. 오전에 기차에서처럼 민감하게 굴지 않고자 괜찮다는 눈인사를 건넸다. 상대도 눈인사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계산을 마치고 이젠 그 사람이 계산을 할 차례였다. 캐셔 직원분이 내게도 건네었던 ‘hi, how are you?’로 그를 맞았다. ‘terrible’ 응 ? 내가 잘못 들었나? 가볍게 건네는 인사에 저렇게 대답한다고? 슬쩍 쳐다보니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나무랄 건 아니었다만 어딜 가나 그렇게 매사에 불만인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오늘 그의 하루가 유달리 좋지 않았다 해도 저런 태도로, 저런 말투로 할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기억들이 많은 건 그러고 보니 참 감사하고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만 있지 않다. 그가 눈인사를 했는지를 내가 기억이 못하는 게 아니고 그가 안 한 게 맞았다. 캐셔 직원은 별다른 응대 없이 그를 대하고 있었고 나는 자리를 피했다.




기차역으로 가는, 아까 왔던 길을 역방향으로 걸었다. 아직 촉촉한 공기가 있었다. 상쾌한 공기를 깊게 마셨다. 마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느낀 언짢음이 계속 남아있었다. 내게 긴장을 놓치지 말라는 신호를 주는, 노란 신호등 같은 사람으로 여기기로 했다. 도착한 역에는 그새 가로등 불이 켜져 있었다.



선로 문제로 45분 출발 기차가 20여분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아무렴 어때. 나는 이미 역에 있었고 이제 집으로 갈 거니 그저 맘 편히 기다릴 수 있었다. 오전에도 이렇게 여유를 부렸다면 좋았으려 만.

선로를 앞에 두고 벤치에 앉아 그녀가 준 천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브로셔 사이에 껴둔 그녀의 명함을 다시 꺼내 보았다.

받아 든 브로셔를 얌전히 들고 나왔다면 그녀 이름도 알 기회가 없었겠다. 용기 낸 스스스로에게, 정성 들여 안내를 해준 M에게 고마웠다.



챙겨 온 보조 배터리를 쓰지 않은 하루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하루를 온전히 잘 쓴 느낌이 들었다. 미슐랭에 빗대어 적어둔 내 가이드 - '방문을 위해 멀리 찾아가 볼 만한 곳’이란 표현이 정말 딱 맞았던 곳이었다. 런던에서 88마일 떨어진 이곳, royal leamingron spa도 안녕!



+



오는 기차에서도 창가 쪽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역방향으로 앉은 데다가 밖이 어두워 안 보이고 차창에 비친 내 모습만 보이길래 오는 길에 일찍이 덮어 넣었던 책을 다시 꺼냈다. 그리곤 꽤나 잘 읽었다. 매번 책 표지나 남들이 책 읽는 것만 지켜보다가 모처럼 책을 읽으니 너무 좋았다. 그리고 꽤나 잘 읽혔다. 한 시간 읽고 한 시간은 꿀잠을 잤다. ㅎㅎ


+

나만의 가이드란 얘기가 나온 김에, 이번 여행지로 파리와 런던을 고른 이유를 잠시 짚어볼까 한다.


파리.

올해 3박 5일 휴가를 받아 들렀을 적에 공항에서 곧장 tgv를 타고 리옹으로 가 계속 그곳에서만 지냈던 터라, 기차 풍경으로 잠깐 스쳐 지난 게 아쉬워 그 아쉬움을 해소할 겸 정한 도시였다. 다시 오고 싶은 곳들은 아쉬움을 일부러라도 남기곤 하는데, 아쉬움이 안 남는 도시가 없는 게 문제겠다.. 늘 그랬기에 파리는 이번이 네 번째였고, 런던은 세 번째였다. 이번에도 아쉬웠냐고? 당연한 소리다. ㅎㅎㅎㅎ


그리고 런던.

마지막 날을 남기고 밝히기엔 웃기지만.. 사실 히드로 공항에 가보고 싶어서 정한 거였다. 런던에서 공항을 가본 적이 두 번 있었는데 유럽 내 이동이라 그보다 작은 공항인 스탠스테드와 개트윅 만 가봤었다. 이번엔 파리로 들어와 기차로 움직였기에 런던을 떠날 때나 가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것도 벌써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까 히드로 공항은, 나만의 가이드에 따르면, '그 장소에 가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도 아깝지 않은 곳’인 거다. 내일이 지나면 그곳에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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