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8
눈을 떠서 제일 처음 본 건 엄마 아빠의 이른 저녁상 사진이었다. 그걸 보고 곧장 영상 통화를 걸었다.
매일 나갈 즈음 전날의 사진을 몇 장 보내고, 그날의 날씨를 전하는 안부만 해왔었던 터라 두분도 당황하셨는지 첫마디가 '무슨 일이야' 셨다 ㅎㅎ
- 떡볶이 먹는 거 방해하려구요 !!!
말은 꼭 이렇게 나온다.
그도 그럴게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애교쟁이 겸 말썽꾸러기라면, 애교도 없고 딱히 말썽도 안 피우는, 무던한 듯 무난한 첫째 딸이 바로 나였다.
근데 화면에서 못 보던 스탠드 조명이 보였다. 못 보던 거다 여쭈니 엄마는 말없이 아빠 쪽으로 눈을 흘겼고 아빠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소리 내어 웃으셨다. ㅎㅎ 또 새로운 조명을 들이신 거였다. 아빠 편을 들고자 저도 조명 샀어요 !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아직 이번 달 생활비를 못 보내드렸던 게 생각거든.
월초마다 엄만 나와 남동생에게 각각 생활비를 걷으시는데, 마침 어제 왜 넌 안주냐 하시길래 '이번엔 생활한 게 없는데 좀 깎아주세요'라고 했다가 방금 아빠에게 보냈던 눈빛을 가진 이모티콘으로 그 대답을 들은 터였다.
진짜 집. 서울의 집을 떠올려 보면 구석구석 조명이 참 많았다. 조명을 좋아하시는 아빠 덕분이었다. 이제야 좀 알겠는 그 '비싼 조명'들은 아니다만, 하나씩 짚어본다면 아빠에겐 다 스토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신기한 건 개수를 세어보면 공간에 비해 좀 과한 수인가 하는데, 막상 배치된 걸 보면 그게 전혀 아니었다.
적당한 공간에 적당한 조명을 배치하는 아빠의 센스는 나도 배워야 할 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 어느샌가 나도 조명을 관심 들여 보고 있었고 또 구매도 하게 되더라. 문제는 각 상황에 필요한 조명들이 참 많다는 거였다. 여기 구석을 밝혀놓으면 또 저기도 필요ㅎ...
내가 처음 샀던 조명은 베를린에서 들고 온 거였다. 브라스 마감에 납작한 도너츠 모양의 무광 등(?)이 달린 것.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지만 그날 바로 사지 않고 매일 가서 보곤 했었다. 사본 적이 없는 물건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가게에 들어가 본 것만 세 번이었다. 불 꺼진 가게 밖에서 들여다본 것 까지 치면 더 많겠다.. 무튼 처음으로 산 조명이기도 하고, 친절하신 가게 아저씨와도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나 역시 아빠의 것처럼 이야기가 있는 조명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다음 조명으론 (벌써ㅎㅎㅎ) 바우하우스 조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마음속에서도 점점 시들해져가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이 조명을 봤던 거고. 마찬가지로 가서 본 건 세 번이었다. 가서 볼 때마다 맘에 들었지만, 사실 망설임도 있었다.
다들 빈티지니 유명한 디자인이 많은 브랜드에 열중하는 와중인데, 이제 갓 나왔다는 'NEW' 표시가 달린 것도 모자라 브랜드도 처음 듣고 디자이너도 처음 듣는 사람.. 인 게 망설인 부분이었다. 가만 보자니 진열된 컬러들은 약간 이케아 컬러칩 같기도 하고 말이지. ㅋㅋㅋ 그래도 마음을 굳힌 건 이 조명이 나의 공간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본 게 효과가 컸다.
제아무리 유명한 브랜드, 디자이너의 것이라 한들 나와 안 어울리면 그건 내 것이 아닌 거였다. 가방이라면 내가 원하는 디자인과 구성을 갖추면 그만이었고, 시계도, 신발도 그랬다. 나와 잘 어울릴 거라 믿고 그렇게 구매한 것들만 아직까지 내 곁에 남아있었다.
이 조명도 그럴 물건이었다.
(샀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풀어서 할 수 있다니)
ㅎㅎ 그래서 구매 완료 !!
오늘은 그 외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날씨는 모처럼 푸근했으나 비가 종종 내렸다. 내일은 교외로 나가볼까 해서 기차 티켓을 예매했고, 갤러리에 가는 길에 기네스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선 눈여겨 뒀다가 돌아 나오며 나도 한잔을 마셨다.
잔이 꽤 컸는데 안주 없이도 꿀떡꿀떡 넘어가길래 나도 놀랐다.. 그리곤 저 표정을 지으며 걸어 다니다가 또 다른 전시를 봤고, 트뤼플 버거를 한 번 더 먹었지. 집에 오는 길엔 오늘 글로 뭐가 좋을까 하다가, 아껴둔 마지막 글을 꺼내놓을 때란 생각이 들었다. 조명에 관한 글이었다. 마침 아빠도 나도 조명을 샀으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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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맞이한 세 번째 월요일이자, 12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었다.
빌라 라로쉬로 가는 길이었다. 늦게 나온 터라 어딜 가볼까 떠올렸을 때, 그곳이 떠올랐던 건 처음 방문했을 때 좋았던 기억이 한몫했다. 검색해보니 여섯 시에 문을 닫는다고 나와있어 넉넉잡아 네시 반쯤 도착으로 생각하고 움직였다.
재재작년에 방문했을 적에는 하늘이 파랬던 시월, 아마 이른 오후쯤이었다. 햇살이 강한, 전형적인 맑은 가을날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떠올리면, 공간에 들어오는 햇볕이 제일 먼저 생각나곤 했더랬다. 다만 훑어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건물인데, 그 안에서도 바깥 하늘을 바라보랴 들어오는 빛을 쫓느라 정작 내부는 자세히 못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때보다 계절도 더 늦고 시간도 늦은 만큼 이번에 가면 내부로 들어오는 햇빛은 없겠지만, 대신에 그 안의 조명이 공간을 채우는 걸 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조금 더 그 건물 내부에 집중을 해보고 싶었달까.
그래도 한 번 와봤다고 해가 저물어가는 중에도 뭔가 마음이 편했다. 아는 골목이 보이고, 간판을 지나 금세 입구까지 갔다. 입구에 벨을 눌렀는데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더 벨을 눌렀다. 영 기별이 오지 않아 입구 옆으로 가니 사무실에 사람이 보였다. 창문을 두드렸다. 몸을 벌떡 일으켜 문을 열어준 그는 저 벨이 작동을 안 하는 것 같다며 미안하다 했다.
지난번과 다르게 신발에 씌우는 비닐은 주지 않았고, 닫혀있던 일층 리셥센 반대편 공간이 열려있었다. 우선 그곳으로 들어갔다.
월요일 저녁, 이곳엔 나뿐이었다. 운동화를 신고 와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지 않아 조용히 다녔다.
기억을 더듬으며 지난번과 달라진 배치도 찾아보고.
기대했던 공간의 상황이 고스란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오는 빛은 없었고 대신에 내부의 조명들이 그 안을,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달려 있는 조명 몇 개는 켜져있지 않았는데, 그래도 켜져 있는 조명만으로도 그게 건물은 충분히 채워주고 있었다. 오던 길과 다르게 내부는, 방문했던 공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듯 또 달라 보였다.
햇살이 들어오는 게 날씨나 계절, 하루의 시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상황이었다면 이번에 마주한 공간은 르 코르뷔지에가 전부 계산 해 놓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조명 한 개, 저기에 두 개 그리고 여기에 이런 빛. 이런 식으로. 그렇게 보니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는 조명을 정리하고 계획하는 부분은 어떻게 대했을까? 어쩌면 그도 이 부분을 제일 좋아했을까? 아빠가 르 코르뷔지에의 약간 고집스러워 보이는 섬세한 부분을 좋아한단 걸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아빠는 직업으로 그리고 조명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으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햇살을 좋아라 하는데, 조명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게 재밌는 상황인 것 같다. 처음엔 여기서 자연빛만 찾았는데 이번엔 계산된 빛을 찾고 느끼고 있다니. 두 가지의 빛을 다 느낄 줄 알게 된 걸까? 그런 거라면 너무 좋겠다ㅎㅎㅎ 물론 그러기엔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너무 알겠다만...
좋아하는 공간으로 기억되었던 꼭대기 층에 다다랐다. 주거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집들을 구경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처음 왔을 땐 하늘이 무척 파랬고, 눈앞에 있는 이국적이고 유럽 건물이란 스테레오 타입에 맞는 그 건물들을 보며 마냥 좋았었지.
이번엔 조금 달랐다.
어두워진 탓에 건물이 잘 안보였던 것도 있지만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각 방에서 빛나는 빛들이었다. 원래 있던 조명이든, 직접 구매한 것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집이라는 나만의 공간을 밝히는 빛인 게 중요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집이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방들의 빛은 그걸 대변하듯 제각기 색과 감도가 달랐다.
저 공간을 채우는 것들로는 가구, 카페트 및 기타 소품이 있겠다. 벽의 컬러도 중요하지. 그리고 조명. 조명의 빛. 빛의 크기나 온도. 물론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진짜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되겠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거리를 걸을 때마다 하늘이 아닌 건너편의 불 켜진 집들 보며 걸었는데, 이곳 사람들의 공간은 그렇게 멀리 밖에서 보아도 제각각인 게 보였고 그게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이는 실루엣들로 누군가는 앉아있었고 누군가는 서있었다. 집에 들어와 어두운 방에 붉을 밝히여 오늘 있었던 일 들 중 어떤 걸 생각했을까.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아님 당장 뭘 해먹을지를 생각할까? 피곤해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 어떤 생각이든 가능할 월요일 저녁이었다.
마감 15분을 남기고 나왔다. 제법 어두워져 아까 보였던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온 건물을 다시 바라봤다. 바깥쪽으론 대부분 커튼이 쳐져서 내부가 보이진 않았다만, 아까 보이지 않던 사무실 공간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직 십여분이 남았으니 그들의 일터에서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중이겠다.
집에 가는 길, 서울의 집을 떠올렸다. 아빠의 조명과 나의 조명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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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적어둔 글이었지만 상당수는 다시 고쳐 적어야 했다. 여행 초반과 지금의 내가 쓰는 글은 또 이렇게 조금 달라져 있구나. 나의 예전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 이렇게 글로 보니 새로웠다.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느끼기에 부끄러운 적이 많기에 지난 일기도 잘 안 읽는 편이라..ㅎㅎ
그리고 아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살면서 참 다양한 것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아 온 사람인데 그중에 제일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이런 부분들에선 아빠의 영향을 참 크게 받았구나 싶었다. 불문과인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벌인 행보도, 아무리 나만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한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의 직업이 이쪽이라서요' 하면 그제야 다들 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ㅎㅎ
받았던 좋은 기운과 좋은 영향들을 내가 더 좋게 돌려드려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오늘 두 분의 사진을 받고 영상 통화를 건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좀 더 살가운 딸이 되어보자 다짐하게 되는 시간. 이런 시간들이 모이면 정말 그런 딸이 되어 있으려나. 그래야 될 텐데.
하지만 이번 달 생활비는 조금 더 내가 가지고 있어 볼 생각이다.. 대신에 어색하겠지만 활짝 웃는 셀카를 보내드려야지.
생활비를 제깍 내는 것보다는 웃는 얼굴을 보내드리는 게 더 살가워지는 편인 것 같아서 말이다.
아 아닌가, 둘 다 보내야 하는 건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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