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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 수 있다면, 순조롭게 시작되는 아침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2019년 12월 18일 수요일의 오전도 그러했다.
그러니까, 순조로운 아침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기도 했다.
어제 싸두었던 짐 체크를 한 번 더 하고, 집 앞 카페로 가 크루와상과 더블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크루와상 맛집 카페답게, 모든 사람의 트레이에 크루와상이 담겨있었다. ㅎㅎ 내 기억대로 기억해도 무리는 없었다만, 카페 이름을 너무 제멋대로 불렀던 것 같아 길을 건너 간판이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arro coffee. 몇 번 들르면서 알 게 된 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이탈리아 어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손님 중에서도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거는 이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다른 언어인 줄은 알겠지만 뜻은 전혀 모르는’ 소리를 듣게 될 때마다 또 멍해진다. 그러다 공항에 가서 모처럼 불어로 된 안내말이 귀에 꽂히는 데 어찌나 반갑던지 ㅎㅎㅎ
무튼 사온 빵과 커피는 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먹었다. 카페에서 먹고 나오는 게 훨씬 간단한 일이었겠으나 굳이 사들고 와 방에서 먹은 이유는...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조금 번거로울 순 있으나 심적으론 훨씬 편한 시간이었으니 잘한 일이었다. 히야신스를 마지막으로 꼼꼼히 들여다보며 인사를 전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직 다 봉우리들이 열리진 않았다만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밝고 예뻤다. 다 피어진 모습을 보려면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땐 내가 ‘진짜 진짜 집’인 서울 집에 도착해 있을 시간이겠다. 꽃이 다 펴질 때까지 만이라도 잘 부탁한다는 메모를 화분 옆에 두고 나왔다. 진짜 안녕.
그리곤 공항으로. 마지막 날은 왜 항상 날씨가 좋을까? 이 도시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 날씨 요정이 두고 가는 선물이겠다. 이런 자문자답을 하며 ㅋㅋㅋ 도착한 공항. 런던을 선택한 이유, 히드로 공항!!!!! 드디어 온 것이었다.
근데 도착한 곳은, 내가 오고 싶었던 그 히드로 공항이 아니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부터 헤아려보자면 보름이나 기다려 온 곳이었는데 그 잘못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고작 이삼 분이 걸렸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니... 런던에서 곧장 인천이 아닌, 암스테르담으로 가 경유를 해야 했던 나에겐 작은 경로만 움직이는 비행기들을 위한 터미널이 배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터미널 4. 인천공항으로 비유하자면 여객터미널 1, 2도 아닌 탑승동과 얼추 비슷한 크기랄까. 일직선으로 생긴 지도를 보고 나서야.. 그제야 모든 기대감이 '본격적으로' 우르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우선 가까운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곳에서 가만히 앉아 멍을 때렸다.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뭐 덕분에 런던 한 번 더 올 일이 생겼네. 다음엔 직항으로 올 일이겠다. ㅎㅎㅎㅎ
순조로웠던 오전을 떠올려 보자니, 마음을 다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일어났다.
그럼 이제 뭐하지?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일찍 체크인을 하고 들어온 내겐 원래 공항을 구석구석 둘러볼 계획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 바가 보였다. 그래 맥주나 마셔야겠다.
기네스 한 잔과 칩스를 시켰다. 감자튀김을 프라이라 안 하고 칩스라고 부르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었지만, 맛만 있다면야 그런 걸로 시비 걸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먹으며 생각해보니 이곳을 떠나 도착할 스키폴 공항, 매번 이른 새벽에 들렀었는데 오후 시간에 들르는 건 처음이라 또 새로울 일이더라. 불이 꺼져있거나 준비 중이던 공간들이 다 켜져 있으면 어떨지를 머릿속으로 미리 상상했더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그곳에서 한참을 보냈다. 이윽고 내가 타야 할 비행기 편명이 들려왔다.
작은 비행기였다. 풀 부킹이라더니 늦게 들어간 것도 아녔는데 머리 위 짐칸은 이미 꽉 차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백팩을 내가 앉을자리 앞에 내려두고서 앉았다.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보니 그새 어두워져 있었다. 활주로의 불빛과 비행기의 불빛, 그리고 작은 터미널의 빛이 창 가득 찼다. ㅎㅎㅎ 작고 귀여운 히드로 터미널 4..... 안녕... 그래 이번 아녔음 또 터미널 4를 언제 와보겠어? ㅎㅎㅎ
맥주를 마셔서 그랬는지 눈꺼풀이 자꾸 내려왔지만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안돼. 이따 자야 해. 장거리 비행이 남아있으니 그때 잠을 잘 것을 잘 모아둘 일이었다. 런던에서 암스테르담까지의 비행시간은 50분 남짓이었다. 잠과 싸우고 있는데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웰컴 투 스키폴. 반가운 공항, 혼자서 단골이라 느끼는 그런 곳이었다. ㅎㅎ 그런데 비행기가 따라가는 활주로는 조금 이상했다. 점점 공항과 멀어지는 듯했다. 작은 비행기라 공항 본 건물에 곧장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본 건물로 데려다 줄 버스를 타야 했고, 덕분에 스키폴에선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활주로를 달리는 경험을 했다. 떠나온 터미널 4가 생각났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탄 덕분이었으니까. 기대했던 히드로 공항을 못 만난 대신, 새로운 스키폴을 만나고 있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시간을 다시 맞추고는 공항을 둘러볼 준비를 했다.
예상했던 것만큼 공항엔 사람들이 많았다. 환승 수속을 밝고는 제일 먼저 이 곳으로 향했다.
스테들릭 카페. 내가 도착했을 때마다 늘 불이 꺼져있고 앞에 철망까지 내려와 굳게 닫혀 있던 곳이었는지라, 켜져 있을 땐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곳이었다.
들어가 맥주나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 있나 떠올려 봤는데, 환승시간은 그리 여유가 많지 않았다. 겉에서만 둘러봐야 했지만 그래도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으니 곧장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른 곳이라면, 내가 스키폴에 올 때마다 항상 들르는 곳이었다.
창가 쪽으로 의자들과 소파들이 몇 개 놓여 있는 곳. 구석이고 바 뒤에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늘 앉아있는 사람들보다 비어있는 앉을자리가 많았다. 그곳에선 간단히 짐 정리를 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짐 정리를 했다. 그리고 장거리 여행을 위해 신발을 갈아 신어야 했다. 가져온 슬리퍼를 꺼내 두고 워커를 벗기 전에 생각했다. 약속했던 대로(?) 서울까지 잘 가져가 못 신게 될 때까지 신을 예정이었다. 신발에게도 고마웠다.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자꾸 사물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였다...
게이트로 가니 한국어가 사방에서 들렸다. 이제 진짜 집에 갈 시간이다. 시계를 꺼내어 아예 서울 시간으로 시간을 맞췄다.
사실 일을 할 때만 시계를 차는 편이라 여행 중에 시계를 차고 다닌 적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렇게 아날로그 식으로 시간을 바꾸어놓은 후에야 맘이 편했다. 그렇게 시간을 맞추고 나면 시간과 함께 내 마음도 그 맞춰진 시간대의 공간으로 가 있는 느낌이랄까.
이번 여행에선 네 번이나 시간을 다시 맞춰야 했다. 처음엔 여덟 시간 그다음엔 한 시간, 그리고 또 한 시간을 지나 이번엔 다시 여덟 시간의 시간을 감아야 했으니까.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도 풀 부킹이라 했다. 장거리에선 선호하지 않는 창가 자리에 배정을 받게 되었지만 바꾸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다행히 영화 두 편을 보고는 꿀잠을 잤다. 사실 한 편 정도만 볼 생각이었는데 두 번째로 고른 영화가 예상보다 흥미진진했어서 끝까지 다 봐야만 했다. ㅋㅋㅋㅋ 남주의 연기는 형편없었지만,, 줄리엣 비노쉬, 그녀의 한 사람분 연기만으로도 별점 4개 반을 받을 만했다. 영화 제목은 <celle que vous croyez>. 불어 음성이긴 하지만 말이 빨라 다 이해하려면 자막이 필요했는데, 자막은 영어 옵션뿐이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뇌에서 내게 소리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문득문득 느꼈더랬다...
눈을 뜨니 도착 한 시간 전이었다. 영화는 볼 게 없어서 뭘 볼까 하다가 이번엔 프렌즈를 찾았다.
에피소드를 통째로 본 적은 없어 이걸 봐야겠다 했다. 편당 영상은 20분 즈음이라 내릴 때까지 세 개를 조금 넘게 봤다. 이번엔 영어 음성에 네덜란드어 자막이었는데, 자막이 있다 한들 읽을 생각을 전혀 안 했더니 이번에는 뇌가 잠잠했다. ㅋㅋㅋㅋㅋ
보는 도중에 중간중간 영상이 멈추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햇볕으로 달궈진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구름은 온대 간데없고 그새 땅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도착했다.
짐을 찾기까진 거의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제일 늦게 나올 짐이었는데, 하필 레일만 돌고 있을 때부터 기다린 거였다.
빙글빙글 지나가는 레일을 보며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렸다. 일단 창가 자리라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했던 탓에 갈증이 났다. 가방에 남은 물을 원샷 해도 말이지. 그럴 땐 아이스커피지! 그리곤 떡볶이... 나와 약속을 잡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떡볶이를 먹게 될 것이었다. ㅋㅋㅋㅋㅋㅋ
공항 2층, 주차장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나오니 조금씩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막 다섯 시가 되고 있었다.
세시부터 해가 지는 곳에서 온 나는,,, 그런 곳에는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다시금 느꼈다. ㅋㅋㅋ
집으로 가는 길은 차가 조금 막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도착해 곧장 한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보통 한 달 주기로 머리를 자르는데, 여행 가기 전에 서두른다고 조금 더 일찍 잘랐었기에 한 달 텀이 많이 지나있던 참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와선 곧장 짐 정리를 했다. 아빠는 이걸 지금 당장 할 일 이냐며 혀를 내두르셨고, 반면에 엄마는 이런 건 당장 하는 게 맞다고 내게 맞장구를 쳐주셨다.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매번 다르니 이거 참 재미있는 일이다. 정말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사람의 딱 절반이 내게 있었다.
그리곤 모두가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했다. 메인 메뉴는 굴이었는데, 한국의 굴이 크기에선 정말 최고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지...
여행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려 봤다. 결코 순조롭지 많은 않았지만... 그런 일들까지 모두, 벌써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기억으로 떠올려진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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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뜬 건 20일 오후 여섯 시 반이었다. 런던 시간으로 치면 오전 열 시 반. 캬... 기가 막힌 시차였다.
어제 잠든 건 열두 시 반이 넘어서였으니, 눈을 뜬 시간까지를 계산해보면 열여덟 시간을 잤단 건데... 어마어마하게 잤으면서도 시차는 칼같이 맞춰져 있었다. ㅋㅋㅋㅋ 이걸 다시 돌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쩌겠나, 해내야 할 일이었다.
시계의 시간은 이미 맞춰져 있으니, 이제 시차를 맞추는 일이 남았다.
그리고 여행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글쓰기 역시 끝이 남았다.
매번 사진만, 짤막한 글이 덧 데어 져 있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거의 사진만 남았던 여행들이었는데
이번엔 글도 함께 남았다. 이에 덧붙일 감상이라면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메거진 제목을 이 글들의 집합이 될 수 있게 바꾸고 싶은데 우선은 그걸 떠올려 봐야겠다.
‘찍고 쓰다’라는 카테고리는 별도로 남겨둘 예정이다. 여행은 끝났지만 또 모르지, 사진을 찍다가 조금 긴 글을 쓰고 싶을 때 찾아올 공간을 남겨둬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쓰다’는 쭉 업데이트가 되어야 할 일이고.
두서 없었을 제 머릿속 생각들과 하루들을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있어요. ㅎㅎㅎ
그럼 모두 안녕히 !
d+31과 d+32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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