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무려 세 번이나 그랬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 집에서는 꿈을 한 번도 안 꿨네’ 했더니 보란 듯이 연달아 세 개나 꾼 거였다.
꿈 내용은 조금도 기억이 안 나지만 어제 생각을 이 집이 들은 걸까?
정신 차리기 위해 시간을 보려 핸드폰 화면을 켰다.
현재 시간 : 열 시 삼십 분. B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녀가 문자를 보내 놓은 시간은 십분 전이었다.
‘오늘 시간 되면 커피나 한 잔 할까?’
B는 학부 졸업 후 잠깐 인턴으로 일했던 리서치 기업에서 만난 한 살 터울의 언니였다.
시시콜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sns로 서로의 근황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매번 내가 유럽 다른 도시들에 도착했단 근황을 올릴 때마다, 비슷한 시차로 와있는 걸 매번 반가워해 줬던 B.
그녀는 이곳 런던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산다고 말하는 건 꽤나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거주하는 공간이 있고, 일하거나 공부하는 곳도 있어야 하니까. 은행 계좌 발급 조건과 거의 비슷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나라의 은행 계좌가 있다면 그곳에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 파리 다음 행선지로 런던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B가 떠올랐던 건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는 월요일인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이런 급 약속도 좋았다. 마침 눈도 빨리 떠졌고 !ㅎㅎ
답장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창 너머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쁘더라.
‘좋아요 ! 몇 시쯤?? 와 오늘 하늘 너무 예뻐요’
파리에서도 갑자기 약속을 잡을 때 그날 하늘이 너무 예뻐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도 그날의 하늘과 같았다. 파란색 바탕에 하얀 구름.
사실 오늘 가볼 곳으로 생각해둔 게 한 곳 있었다. 일요일인 오늘도 여는지 확인해보느라 구글맵으로 정보를 봤었는데, 연결된 사이트 링크로 가보니 꽤 다양한 전시를 하고 있어 여유 있게 하루를 다 그곳에서 보내도 되겠다 싶었거든. 혹 얘기가 길어져 18시까지인 뮤지엄에 가지 못하게 될걸 대비해서 작은 책도 하나 챙겼다. 어제 적어둔 늘 가지고 나가는 짐들에 책이 추가된 거였다.
B와는 열두 시 반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식사 맛집보단 커피 맛집에 집착을 해둔 탓에, 미리 지도에 체크해둔 카페 목록이 꽤 되었는데 내가 그녀에게 보낸 몇 개 중에 그녀가 고른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줄, 서울에서 가져온 선물도 챙겼다. 약과와 새콤달콤 6가지 맛.ㅋㅋㅋㅋㅋ
리옹에 있을 때 (이렇게 시작되어야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나조차도 지겹지만 어쩔 수 없다) 잠깐 서울에 다녀온 친구가 미니 약과를 사 와 내게 나눠 주었는데 한국에선 제 돈으로 사 먹지도 않던 그게 왜 그렇게 맛있고 귀한지... 그때를 떠올리며 손바닥만 한 개별 포장된 약과를 한 세트를 사 왔던 거다. 새콤달콤은 보너스. ㅋㅋㅋㅋ
타지 생활이란 게 괜히 더 자기와의 싸움 같은.. 그 생활이 참 고된 일인걸 알기에, 내가 먹을 김치를 포기한 들, 저것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 내 브런치를 읽기 시작할 그녀에게 보내는 생색이니 귀엽게 봐주시길. ㅎㅎ)
카페에선 둘 다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아침을 안 먹고 나온 날 위해 B가 파운드케이크도 두 개나 사줬는데 너무 맛있어 마저 먹기 위해 나는 잔을 비운 뒤 롱 블랙을 한잔 더 마셨다.
(그녀의 학교가 근처였어서 자주 오던 곳인데 그새 잊고 있어 오랜만에 와본 다 했다. 근래 다녀봤던 그 어느 카페보다 혼자 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일 중요한 커피맛도 굿! )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는 시간이었지만, 지나온 시간 어떻게 살았는지보단 현재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눴던 것 같다. 마침 내가 머물고 있는 동네는 그녀가 지난주 다른 동네로 이사 가기 전 살았던 곳이라 근처 구경하기 좋은 길들을 지도로 같이 보기도 하고. 그러다 그녀가 이 근처 리빙샵들이 많다고 같이 둘러볼 걸 제안했다. 이사를 하면서 웬만한 가구와 조명, 식기들을 새로 샀고 또 채워 넣을 게 있다고. 내가 봐 둔 조명을 파는 전문 매장도 근처에 있단 걸 알고 있었기에 그곳도 같이 가볼 겸 나왔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B는 내가 온 날부터 날씨가 좋았던 거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게 예보대로 비는 매일 왔으나 거진 새벽이었다. 낮에도 비가 내린 날은 한번 있었나 했었다. 나 진짜 날씨 요정인가...
무튼 카페를 나와한 네다섯 곳의 로드샵들을 연달아 들어갔다 나왔다. 식탁이나 소파, 식탁과 의자 같은 가구만 전문으로 하는 곳도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리빙’과 관련된 거의 모든 곳을 파는 곳들이 많았다. 아는 브랜드들도 있고, 새로운 브랜드들도 있었다. 들어간 곳마다 연말을 맞아 세일 코너를 곳곳에 마련해 두었고, 그곳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며 그녀의 식기류와 소품들을 같이 골랐다. 그중 짙은 초록색 잔은 (스모크 그린이라는 컬러가 붙어 있었다) 세일을 하지 않아 오늘 구매하진 않았지만, B가 곧 그것들을 사러 들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이미 충분한 쇼핑을 하기도 했고 ㅎㅎ
고른 것들 중 B가 구매한 것 : 맥주잔으로 딱일 유리 잔과 각진 턱이 포인트인 와인잔, 거친 듯 아닌듯한 표면의 중간에 움푹 들어간 디테일이 있는 짙은 푸른색 화병 그리고 채도가 낮은 에메랄드빛 촛대와 녹색 초.
세시 반 정도 되었나,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양손도 무거워져 있어 더 구경은 무리일 듯싶었다. 나를 만난 후 집으로 가 내일 출근 전에 해야 할 컴퓨터 업무가 있다고 했던 것도 문득 생각났고. 그래서 이만 헤어지고 나는 가보려고 했던 뮤지엄에 가볼까 한다 말하던 찰나,
B가 같이 집으로 가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떤지 물었다.
샵들을 둘러보며 그녀가 골라둔 가구와 공간들이 매우 궁금하던 참이긴 했지만... 다행히 집에서 먼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의 남편도 B의 갑작스러운 초대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리하여 같이 마실 맥주는 내가 사겠다고 용기를 내 같은 방향으로 튜브를 탔다.
자 사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어느 문화권에선 집에 타인을 초대하는 일이 흔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생면부지의 사람을 초대하진 않으니까.
일요일 저녁 시간, 나를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해준 B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도 전할 겸ㅎㅎ 오늘 함께 나눈 얘기와 구경했던 것들도 그 맥락에 이어지는 상황이었던 거라 앞 이야기를 생략해 버릴 수 없었어서 서론이 길었다.
처음 런던에 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을 때도 그녀가 집에도 와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겐 '기회가 된다면’이란 가정이 붙은 상황이었기에 예고된 듯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도착한 동네는 우리가 튜브를 탔던 도심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낮은 건물들과 마침 멀리서 붉게 물드는 하늘색이 이곳의 첫인상으로 기억되겠지.
KFC에 들러 치킨과 칩스를 샀고 맥주도 두둑이 ㅎㅎ 사서는 도착한 B의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의 남편인 P가 문을 열어 우릴 맞이해주었다.
‘nice meet you !’
‘nice meet you, too !’
(P와 인사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라, 영어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저 인사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내겐 되려 낯설고, 그런 상황을 만나 내뱉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용기가 많이 필요한 문장이다.)
우와.
밖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내부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제일 먼저 보였던 건 런던 생활 4년 만에 처음으로 구매했다는, 거실 한편에서 빛을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였고, 이윽고 색에 관심이 많아졌다던 그녀가 고른 짙은 남색의 카우치와 짙은 녹색의 식탁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고른 화병과 촛대를 둘 밝은 나무 컬러를 가진 모서리가 둥근 식탁도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예의상 집의 내부 공간으론 이곳만 찍어 봤다.)
지난주에 이사와 정돈이 안되어 있다고는 했지만 보인 주방- 거실 공간만큼은 말 그대로 ‘warm & cozy’ 였다.
‘진짜 집’에 온 것이었다.
제아무리 에어비엔비가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다 한들, 갖춰진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손길과 온기’가 계속 맴돌아야 그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그걸 B의 거실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에어비엔비가 생겼던 처음 그 발상대로 원래 살던 사람이 잠시 집을 비우게 되는 때에 그 공간을 타인에게 임대하는 컨셉은 이곳 유럽에서 마저도 이미 극소수였다. 이번에 내가 머물렀던 집들과 비교해보자면 그곳은 사실 ‘무늬만 집’이었던 거지. 아, 파리에서의 두 번째 집은 집주인의 짐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예약은 항상 차있고 올라오는 평점과 코멘트도 주에 몇 개씩... 그런 리얼한 연극무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ㅎㅎㅎ
물론 그럼에도 나는 계속 에어비엔비로 집을 찾을 것 같긴 하다. 정형화된 공간이 아닌 곳을 찾으려면 그 원래 컨셉을 고수하는 곳인지는 사실 중요치 않았으니까. 무튼 내가 머무는 곳들을 ‘집’이라 칭하긴 했다만, 이런 진짜 집,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와 편안함 들을 기대할 순 없었다.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어찌 보면 작은 부분이지만 내가 그걸 캐치해 낼 수 있었던 건, 진짜 집에서만 나오는 이런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머문 곳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작은 방 하나일지라도 말이다.. 잘 있니 내 방아..?
식탁에 모여 앉아 치킨과 칩스, 맥주를 마시며 얘기했다. 그러다 두 번째 맥주 캔을 받아 들 때쯤, 먹은 걸 정리하고 P는 최근 시작한 게임을 하러, B는 식탁에서 컴퓨터를 켰다. 나는 가져온 책을 꺼내어 식탁을 등지고 있는 소파에 자리 잡았다. 얘기했던 대로 각자 시간을 보낼 차례였던 거다. 음악이 있었고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나 B의 타자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P는 다른 방에 가있어서 그가 하는 게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ㅋㅋㅋ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나는 그녀가 내려준 커피를 가지고 식탁에 앉았고 내일 출근할 사람들을 위해 삼십 분만 더 머물다 가겠다고 했다. 늦은 시간은 아녔지만 밖은 깜깜했고, 금요일도 토요일도 아닌 일요일 저녁이라 그랬다. 일이 아직 남았을 B는 컴퓨터 화면을 덮고서 그 남은 삼십 분을 내게 디저트도 내어주고, 이사 오기 전 집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내부에 가구를 어디에 놓을지 미리 시뮬레이터를 돌려볼 수 있는 사이트로 그 기록들을 보여줬다. 그리곤 돌아오는 목요일로, ‘공식적인’(?)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해주었다. 그날 나는 오늘 산 파란색 화병에 어울릴 꽃과 디저트를 준비하기로 했고. 진짜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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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잔으로 딱일 거라 했던 잔은 정말 딱이었고, 촛대와 화병도 식탁과 그녀가 미리 사둔 머스터드색 화분과 잘 어울렸다. 심지어 할인도 받았잖아! ㅋㅋㅋㅋ 맥주잔은 나도 탐이 났지만 저 야리야리한 걸 제대로 들고 갈 자신이 없으니 오늘 B의 집에서 맥주를 담아 마신 걸로 만족해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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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집에는 거실 공간 만한, 꽤 넓은 안뜰이 있었다. 바깥이지만 펜스로 둘러 쌓여있으니 지붕 없는 방 같은 공간이랄까. 바베큐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그릴 도 있고... 제일 부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을 구경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봤다. 아마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쯤이면, 완전히 동그래져있을 것 같았다. 얇은 초승달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자연은 참 묵묵하고 정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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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조명...!
조금만 더 투자하면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들도 탐내 볼만 했지만 그 속에서도 저게 제일 예뻤다. 어쩔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ㅋㅋㅋㅋ
내일은 돈 주고 가져와야지 !!!
아, 조명 살 돈은 w의 지갑에서 나왔다... (크리스마스 만세 ! w 만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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