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이 아니고

d+20

by regine


사실 어제 저녁 테이트에 갔었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 알고 있고, 그게 보고 싶은 건 유일한 곳이었다. (사치 갤러리에서 투탕카멘 전시를 한다는 걸 알고.. 아쉬웠다 안 갈 것 같아서...)


생폴 근처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템즈강을 가로질러 곧장 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다리였다. 전에 이 다리를 건널 때도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었었다. 바람에 핸드폰이 날아갈세라 양손으로 쥐고 사진을 찍으며 건넜었지.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냥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내가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테이트 모던. 어제는 오후 열 시까지 전시관이 개방되어 그런지 도착한 시간이 여덟 시 즈음이었는데 나처럼 이제 막 들어가는 사람들도,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아직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티켓을 끊으러 가야 했는데 갑자기 답답했다. 아니,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빼곡히 서 있는 북샵에 들어가 구경을 한참 했으니까.


북샵을 나와선 ‘ASK ME’라고 적힌 가방을 멘 사람들과 그들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가방엔 뭐가 들었을까. 일을 할 때 저 가방 컬러를 자기 취향에 맞게 선택하여 메고 있는 걸까? 눈에 잘 들어오는 색이긴 하네. 사람들은 저분들에게 무슨 질문을 제일 많이 할까?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요? 오늘 몇 시까지 해요? 전시장 입구는 어디죠? ... 이런 안 해도 무방한 생각들을 하며 초입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나왔다.

오늘은 아닌 것 같아.



집에 가면서 아까의 기분을 떠올려 봤다. 기분을 핑계로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한 게 최선이었는지 의문도 들었다.

내일 가 볼 곳은 오늘처럼 오전에 늦장 부리며 정할 것이 아니라 (두시쯤 나오는 나날이었다. 나오고 나서 어딘가에 도착해서 숨 좀 돌리면 금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세시 ~ 네시면 해가 지는 이곳은 겨울의 런던) 미리 계획을 짜 봐야겠다 했다.

내일 날씨에 비 얘기가 없으니 공원 안에 있는 곳도 가고, 여기도 가고, 저기는 좀 멀지만 할 수 있다면 저기와 저기2를 묶어 다녀와야겠다.


아까의 의문이 '내일은 그러면 안돼'로 결론이 난 결과였다. 근데 잠이 안 왔다. 안돼 내일은 정말 일찍 일어나야 해.



맞춰둔 알람보단 늦게 나왔지만 어제 계획을 짜 둔 덕분에 나온 시간은 제법 당겨져 있었다.

이젠 집에서 역을 가는 방향에선 구글맵을 켜지 않아도 된다. 역에선 두 개의 노선이 같은 레일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탈 튜브는 15분 뒤에나 도착했다. 기다리다 갈증을 느껴 가방에서 물을 찾았다. 없었다. 또 뭐가 없지? 장바구니와 충전기 선이 없었다. 고작 한두 시간 서둘렀다고 매일 들고 다니던걸 놓고 나오다니... 마침 내가 타야 할 튜브가 도착했다. 시간이 맞물려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타서 구석에 끼여 서있었다. 문득 그 순간에 알겠더라. 어제저녁 느꼈던 감정이 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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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가방에 챙겨 나오는 것들>

오이스터 카드, 지갑, 무선 공유기, 보조 배터리와 선, 립밤, 손거울, 휴지, 장바구니, 열쇠, 물.


<매일 하는 것>

아침에 일어나 씻고 간단히 배를 채운다. 커피와 쥬스를 마시면서, 가볼 곳을 정한 뒤 나간다. 나가서 걷고, 어딘가에 들어가서 본다. 우와 아니면 음.. 또 다음 장소. 가는 길도 괜히 둘러가 본다. 카페에 들러 커피. 또 걷는다. 구경. 그리고 또 다음 장소... 그리고 집. 혹은 집에 오기 전에 집 앞 마트에 들러서 집.


매일 같은 물건들을 챙겨 나와 매일 엇비슷한 패턴으로 살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 새로운 곳에 가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곳들에 들러 무언가를 느껴 야만 하진 않을까 갈증도 냈었다. 근데 정작 흡수해내기엔 좀 버거웠던 것 같다. 매일 새로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지.


새로운 환경에서 일상적인 것들 조차 낯설게 보이는 순간들을 좋아해 여행을 한다는 게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였다면,

시간을 가지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자고 해서 온 거라는 게 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이유’로는 ‘목적’이 충족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던 거다. 이걸 답답함 말고 뭐라 하면 좋을까, 불충족의 감정? 불충분의 감정?... 그냥 메롱한 기분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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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에서 내리기 전에 오늘의 계획을 급히 수정했다. 네 곳에서 두 곳으로. 메롱한 기분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고 싶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올라오니 하늘이 더 맑게 개어있었고, 구름 운도 많이 보였다. 파리에선 이런 날의 날씨를 ‘쨍하고 추운 날’로 기록해 뒀었는데 오늘의 런던은 그렇게 춥진 않았다. 파리에서보다 더 겹겹이 챙겨 입고 나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하이드 파크 구석에 있는 서펜타인 갤러리는 이렇게 날이 좋은 날 꼭 다시 가고 싶었다. 처음 갔을 땐 비가 잔뜩 내렸던 날로 기억하는데, 공원의 식물들과 땅이 머금은 습기에 내부 공간 자체가 굉장히.. 으스스했더랬다. 작은 공간이지만 맑은 날씨를 듬뿍 머금고 있어 충분히 좋았다. 이곳의 엽서 컬랙션은 다른 곳과 다르게 다양해서 이번에도 여기서 엽서를 샀다.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에 맞는 엽서를 고르다 보니 손이 그새 묵직해졌더랬다.



다음 가볼 곳은 조금 멀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안뜰에 찾아가 햇볕을 좀 더 즐기다가 버스를 탔다.



그렇다. 원래 네 개였던 일정에 이 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삭제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곳만 둘러보고 나왔다. ㅎㅎ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고,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물을 사러 들렀다가 와플 과자도 골라나와 첫 번째 버스를 탔다. 그동안 튜브만 타고 다니다가 덕분에 이층 버스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도착. 내려서 구글맵을 따라 십 분여를 걸었다. 날도 많이 어두워져 있었고 동네도 불 켜진 곳이 별로 없어 으스스해 보였는데, 곧 간판이 보였다. '사우스 런던 갤러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태 방문한 곳 중에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곳이었다!!!!

보통 갤러리들에 방문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곳을 즐기는 지를 보는 것도 하나의 큰 재미인데,

여기선 내가 신나서 집중해보느라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질 못했다고 하면 표현이 되려나. ㅎㅎㅎ



전시관은 두 곳이 있었는데, 본관 외 다른 건물은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오래된 소방서를 5년 전에 기증받아 내부를 꾸민 곳이었다. 갤러리도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입구에 예전 소방서 사진과 그런 얘기들을 붙여놨는 데 그것조차 좋았다. 그곳의 맨 위층에 있는 공간은 유치원처럼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아이들의 손길들이 기발하고 신선해서 여기서도 꽤 시간을 보내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서는 가져온 브로셔들을 펴보기도 하고, 좋았던 부분들을 찍어둔 사진을 다시 살펴봤다. 멀어도 다녀오길 잘했고, 오늘 일정에 남겨두길 잘했다 생각했다.

아, 바로 집에 들른 게 아니라 집 앞 웨잇로즈에 가서 페일 에일 맥주 한 캔을 사 왔다. 예전엔 무조건 흑맥주만 마셨는데, 취향이 바뀌었다. 매일 다른 캔을 맛본다면 페일 에일 다음엔 IPA를 마셔볼 참이다.


무튼 이틀에 한 번꼴로 이 곳에 들르고 있는데, 계속 같은 캐셔와 인사를 하게 되었고 오늘도 그랬다.

첫날 계산을 도와줄 때 맥주가 있는 걸 보고, 내게 아이디카드를 요구했어서 여권을 보여주니 ‘고마워요’라고 하길래, ‘이건 제가 고맙다고 해야 될 상황 같은데요’하고 같이 웃었더랬다.

맥주 한 캔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녀는 내게 아이디카드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웨잇로즈 멤버십 카드는 안 만들어요?’라고 물었다. ‘음 괜찮을 것 같아요, 저 여행 와있는 거라 열흘 뒤면 떠나서요’ ‘okay then see you soon darling’.


여기 사람들은 저 ‘darling’이란 표현을 참 많이 쓴다.

지하철에서 아이를 업고 유모차를 내리는 사람에게도 도와줄까? 하면서 darling,

앞서가는 사람이 뭘 떨어뜨려 그걸 주워 건네주면서도 darling.

들을 때마다 ‘내겐 사랑이 가득하니 네게도 좀 나누어 줄게’로 들린달까. 모쪼록 사랑스러운 표현이다. ㅎㅎ


찡긋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집 현관 비밀 번호를 떠올려본다. 0142. 고작 네 자리 숫자가 은근 또 헷갈려 ‘015B’를 먼저 생각 한 뒤 0142를 생각해낸다. 정작 015B 노래는 하나도 모르면서 말이지..


계단을 오르며 오늘의 일을 짧게나마 떠올려본다. 그중 드문드문 내 밝은 표정들이 보였다. 웃기다. 어제 같은 시간에 느꼈던 그 메롱한 기분은 어디 갔지요??... 그 기분이 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게 어제만큼 날 지배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열흘 뒤면 이곳도 떠나야 한단 말이다....


오늘 사온 맥주도 맛있으려나, 얼른 냉장고에 넣어둬야지.

d+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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