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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기사 떠나온 파리에서는 이례적으로 11월에 백화점들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오픈했고,
브뤼셀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벌써부터 한창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것도 12월 초이니 서서히 장식들이 많아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오늘 할 얘기는 지금의 내가 본 런던이 아니라, 처음 왔던 런던의 이야기다.
그때는 보다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내 또래는 아마 러브액츄얼리를 보고 런던에서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을까? 우선 내가 그랬다. ㅎㅎ 물론 좋았다. 캐롤이 넘쳐흐르고 온갖 장식들은 런던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빛나고... 리옹에서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길거리마다 있었다만 이 정도는 아녔기에 그 규모와 휘향찬란함에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즐기다가 딱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만 런던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크리스마스 이후의 그 처량한 분위기는 바로 전날과 비교했을 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샵들의 유리창에 붙은 크리스마스 문구들이며 산타 복장이 철 지나 보이는... 하룻밤 사이 설렘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 싫었다. 그랬기에 25일 저녁으로 리턴 티켓을 끊은 건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는 25일 까지야! 라며.. ㅋㅋㅋ
당시 한인 민박에 머물렀었는데, 내가 돌아가는 날을 듣고는, 다들 26일이 박싱데이인 거 몰랐냐고.. 그것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다고.. 그래서 졸지에 그 자리에서 내가 제일 이상한 사람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일해서 산다기 보단 사고 싶으면 사야 되는 소비 패턴을 가졌기에 박싱 데이나 블랙 프라이데이엔 큰 관심이 없다. 사고 싶게 만드는 물건을 찾는 것도 자주 오는 일도 아니고.. (오늘 갖고 싶은 조명을 발견하긴 했다. ㅎㅎㅎ)
무튼 지금보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던 그때는 리옹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왔었다. (16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파리와 릴을 지나 런던으로. 바르셀로나도 같은 방법으로 갔었다. 런던 갈 땐 버스로 지하터널을 지난다.) 돌아갈 때도 그 버스를 타야 했는데, 여기서도 크리스마스 당일에 떠나는 게 문제가 되었다. 거의 모든 버스와 지하철이 운행을 단축하거나 안 하는 것.... 그나마 운행하는 것도 버스 터미널 한참 전에 내리는 거였고, 거기서 내려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걸 생각하더래도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어쩌겠나 싶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버스가 끊기기 전에 탔고, 그 마저도 터미널에서 삼십 분 거리에 내려주어 캐리어와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도착한 터미널 역시 크리스마스 당일엔 배차된 차량이 없는지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건 터미널 본 건물 바로 바깥쪽에 붙어있는 유리로 된 컨테이너 공간이었다. (크기가 딱 컨테이너 정도였다.) 홑겹의 외벽으로 밖과 겨우 분리가 될 정도니, 찬 바람이 느껴졌고 그곳에서 한 세시간여를 노숙 아닌 노숙을 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떠나지만 않았어도 그런 고생을 안 해도 되었을 건데... 이러다 버스조차 안 오거나 습격을 받아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할까 라는 둥 온갖 생각에 긴장을 하며 추위와 싸웠다.
남들은 잔뜩 기대하는 크리스마스의 런던.
터미널의 조촐한 대기실에서 마무리했던 그날의 이야기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뭐 크리스마스 장식을 12월 25일 이후에 보는 건 지금도 조금 불편(?)하다만 ㅋㅋㅋ
오늘 알람이 떠서 뭔가 하고 봤더니 돌아가는 티켓이 '다음 일정'으로 떠있더라. 헤아려보니 열흘 정도 남았다.
돌아가면 서울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겠다.
급하게 결정한 여행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답을 찾길 바란 게 욕심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곳에서도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돌아가서도 이런 부지런함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스스로를 잘 추려볼 일이다.
그렇게 연말을 잘 보낸 뒤, 내가 좋아하는 연초 - 첫 장을 잘 펴야 할 것 같은 그런 노트 같은 -를 잘 맞이해 봐야겠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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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문했던 한 곳의 뮤지엄에선 너무 실망을 했더랬다... 명색이 '디자인 뮤지엄’이었는데 말이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너무 막 사용한 거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다. 디자인이란 개념이 사실 정말 큰 범위라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대충 알겠다만 그거뿐이었다. 포함될 수 있는 다양한 카테고리 전체를 다 담아내지도, 그렇다고 섬세하게 짚은 것도 하나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위안 삼자면, 런던에서 먹은 커피 중 제일 맛있는 롱 블랙을 마셨고, 호기심 많은 소녀를 관찰해볼 수 있었다는 거. 사실 이 정도만 돼도 충분했다. 티켓값은 굉장히 비싼 곳이었지만... 하하
느낀 게 딱히 없으니 새로운 글을 쓸 건덕지가 없어 아껴두었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적었다. 다른 주제로 적어둔 글도 하나 남았는데 오늘 같은 날이 또 있을 수 있으니 잘 아껴놔야겠다. ㅎㅎ 세이브 원고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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