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열두시 십오 분 기차였는데, 도착 시간이 한시 반으로 되어있길래 오 가깝네 했더랬다.
도착해보니 그 한시 반은 프랑스에선 두시 반..
시차를 한 시간 넘어온 거다. 시차가 바뀔 때면 늘 아리송한 듯 묘한 느낌이 든다.
시차 덕분에 한 시간이 더 생겼지만 오전부터 이동을 한 탓일까, 배가 너무 고팠다.
역에 있는 빵집 겸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에 앉았다.
내가 시킨 건 커피와 오렌지주스 그리고 ‘오늘의 수프’. 옵션으로 고를 수 있는 오픈 토스트는 아보카도로 선택.
받아 든 수프를 스푼 가득 올려 먹었다.
아하.. 고수 향이 짙게 났다.
고수 향을 즐길 줄 알게 되면 느낄 수 있는 맛의 범위가 훨씬 풍부해질 거라 누가 그랬다만, 아직 내겐 아니었다.
그리고 베어 문 오픈 토스트. 여기도 고수가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첫끼는 고수 만세의 현장이었다..
정말 향이 강하게 났지만 살다 보니 허기가 그걸 이기는 날이 왔고 그게 오늘이었다.ㅎㅎㅎ
싹 비워 먹고선 집으로 가는 우버를 잡아 역 밖으로 나왔다. 두 시간여 이동해왔을 뿐인데 이렇게 벌써 분위기가 달랐다.
도착한 집엔 역시나 계단이... 그나마 다행인 건 경사가 심하지 않고 카펫도 깔려 있었다는 거다.
오늘 떠나온 집 계단을 내려올 땐 정말.. 이 짐들이 그냥 다 내 업보이겠거니 하고 이 악물고 내려왔다. ㅋㅋㅋㅋ
0층을 지나 내가 머물 곳은 1층. 에어비엔비 사진으로도 좁아 보이는 곳이라 얼마나 더 좁을까 하고 들어왔는데 딱 사진과 같았다.
이전에 머물렀던 집들은 기재된 숙박 인원이 최대 4~6명까지도 있었다. (6은 사실 말도 안 된다!)
그곳과 다르게 이곳은 딱 일인용 공간이었다. 원룸에 라디에이터도 한 개, 창문도 한 개. 나름 알차게 책상과 냉장고, 미니 주방과 식기류가 마련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보니 밖은 그새 어둑해져 있었다. 캐리어를 눕혀둘 공간마저도 답답해 정리를 다 마친 뒤 캐리어를 세워두었다.
이곳의 해는 확실히 파리보다 짧았다. 아니, 시차로 따르면 비슷한 건가. 신기한 건 추위에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파리보다 온도가 높았다는 거.
해는 졌고, 피곤도 하고, 오늘 딱히 가볼 곳을 생각해 두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데 뭘 할까 생각했다.
아까 집으로 오는 골목으로 들어올 때 봤던 제법 큰 waitrose가 떠올랐다.
물을 사야 하고, 요거트도... 쥬스도 사 와야겠다 싶었다. 일단 물이 문제였다. 하루에 한 병씩 들고나갈 작은 페트 여러 개랑 집에 두고 마실 큰 페트를 사야 했으므로. 일단 장바구니를 두 개 모두를 챙겨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곧장 꽃들이 보였다. 오 ! 꽃을 살까?
파리에선 은근 꽃 파는 곳을 보기 어려웠다. 집에 두었던 튤립도 시장에 나가서야 발견한 거였다.
연녹색 스카프를 두른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백합 한 다발을 막 집어 들고 계셨다. 오늘의 차림과 비슷한 색으로 고르신 건 우연이려나 ㅎㅎ
꽃은 꽤 다양한 편이었다. 초입에 있다 보니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 섹션을 한 바퀴 쭉 둘러보는 이도 많았다. 일본이나 영국엔 이렇게 마트에 파니 꽃을 더 쉽게, 많이 자주 사봤겠지? 식물을 자주 보고, 쉽게 사고 그걸 가꿔본 사람의 경험치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당장 먹을 수 있거나 관상용 외 써먹을 곳이 딱히 없기도 하니까. 이런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란 건 참 부럽다.
일단 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부가 꽤 커서 한참을 가야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여길 구경하자 싶었다. 모든 코너를 둘러보진 못했다만 다양한 걸 팔더라.
나라마다 문구점과 마트는 꼭 가는데, 특히 마트의 경우는 좀 더 세분화해 브랜드별로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카르푸 / 모노프리 / 프랑프리 / 오샹 등이 있겠고 (요번에 G20 이란 곳은 처음 봤는데 가보진 못했다.) 기억에 영국엔 테스코 / 웨잇로즈 / 세인즈버리 / 막스앤스팬서가 있겠다. 각 브랜드별 PB 구경이나 같은 그룹 라인의 익스프레스나 메트로 같은 부가적인 이름을 보는 것도 재밌고 ㅎㅎ
물을 담고서 한 바퀴 둘러보는 데 귀여운 우유도 보고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프링글스의 ‘솔트 앤 비네거’ 맛도 봤다. 당연히 당장 카트에 담았다.ㅎㅎㅎ 너무 맛있는데 왜 이건 없나요 한국...
맥주도 한두 캔 사고, 쥬스와 요거트까지 끝!
이제 계산대로 직행하면 되는데 꽃 코너에 다시 들렀다. ‘식물을 자주 보고, 쉽게 사는’ 환경에서 살아오지 못했다만, 이런 환경들이 있다면 기꺼이 동참해보고 싶었던 게 컸다.
처음은 암스테르담의 해바라기였고, 그다음은 이번 파리의 튤립이었다. 식물이 있으면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채 보기 위해 집중을 하게 된달까. 그 집중은 그 공간 자체로 퍼지기도 한다. 그래서 꽃을 두고 머물렀던 공간은 조금 더 다른 깊이로 기억되는 것 같다.
꽃을 보며 집에 꽃병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는데, 없었던 것 같다. 유리 꽃병 종류가 세 종류 있었는데 가격은 괜찮았지만 디테일이 과했다. 게다가 작은 방에 두기엔 향기가 다 강한 꽃들이 주였다... 당장은 예쁘겠지만 내일 아침엔 밖에 내놓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ㅎㅎ 어쩔까 하다가 가만 보니 작은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큰 새싹 같은 게 세 개씩 귀엽게도 심어져 나와 있었다. 고작 십여 일 머물면서 화분은 과한가도 했지만.. 귀여운 새싹들을 보던 중에 그 윗칸 뒤에 있던 이걸 발견했다.
각 식물마다 디스플레이 가능한 기간이 쓰여있었는데, 얜 이틀 뒤면 폐기될 애였다. 실제 폐기가 되는 진 모르겠지만 무튼 지금 보이는 이 매대에서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고 보니 괜히 눈길이 한 번 더 갔다. 자기 말고 다른 애들이 선택받는 걸 보면서 뒤로 밀리는 기분은 어땠을까, 썩 좋진 않았겠지. 나랑 가자 !
그리하여 이 화분이, 생뚱맞게도 ㅎㅎ 나의 카트에 담겼다가, 집으로 오는 길엔 팔 한켠에 안겨왔다.
겉흙이 말라 있어 당장 물을 좀 줘야 되지 싶었다. 겉표지를 벗기는데 보이는 ‘히야신스’. 네가 크면 이렇게 되는구나.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위에서 흘린 물이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만 물을 줬다. 물이 나오나 화분 아래를 봤더니.... 이 친구한테 필요한 건 물이 아니라 화분 갈이였다... 하얀 뿌리들이 거침없이 ㅎㅎㅎㅎ 꽉 차있었다.
아이고..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주는 것까지라 미안...
책임질 수 없으면 아예 눈길도 주지 말았어야 했나,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우선은 책상 겸 식탁이 될 테이블 한켠에 두었는데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십여 일 뒤에 떠날 거면서 이걸 구매한 거 자체가, 내가 떠난 뒤 이 화분을 책임지지 못할 상황을 만든 거 아녔던가..
미안해, 대신에 매일 쳐다봐주고 관심을 가져주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도 그럴 거였다만 더 마음을 담아서!! ㅎㅎ
오전엔 해가 책상 쪽이 아닌 싱크대 쪽으로 들 것 같은데 자기 전엔 그쪽에 옮겨두고 내일 한 번 봐야겠다.
근데 너 그늘진 곳에서 자라야 하는 건 아니지...?
히야신스에 대해 찾아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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