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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집에는 세탁기가 있었다. 그래서 간단한 손빨래를 하고도 세탁기를 썼는데
두 번째 집에는 세탁기가 마땅치 않아 어쩌나 하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맞은편에서 세탁방을 봤다.
런던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들러야지 했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았다.
세탁망에 빨랫감을 넣고선 패딩 점퍼에 동전 지갑과 핸드폰만 찔러 넣고 나왔다. 아, 노트북도 챙겼다.
집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대로상에 있는 거니까 그 안에서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리옹에서 기숙사에 살 때, 지하에 있는 세탁실에다가 세탁물을 맡긴 뒤 나가 십 분 거리의 빵집에서 빵도 사고 강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했다. 시간이 얼추 다 되었을 때쯤 돌아와 좁은 방 한편에서 빨래를 널고 낮잠을 자는 시간을 참 좋아했더랬다.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빨래세제 냄새는 비슷하니까. 널어둔 옷가지들이 마르는 냄새는 나를 편안하게 해 줬던 것 같다.
빨래방엔 세탁기 열댓 개와 건조기 세대가 나란히 있었고, 나 말고도 먼저 와있는 사람들이 한 세네 명.
덕분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 두 개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머신에서 고체 세제를 산 뒤, 머신 번호를 선택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빙글빙글. 특유의 리듬을 타며 세탁기 내부통이 돌았다. 그 리듬에 맞춰 넣어둔 빨래도 어색한 듯, 같이 빙글빙글 도는 걸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지켜봤다.
나와 비슷하게 도착한 사람은 이런 세탁방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내게 작동 방법을 물어봤고, 했던 방식 그대로 알려줬다. 그녀도 세재를 사야 했는데, 내가 산 고체 세제가 하나 남아 그걸 건네주었다. 그녀의 빨래를 담은 세탁기도 작동을 시작했다.
나란히 쭈그려 있다가 이따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사람 사는 동네인데 빨랫감 도둑맞을 걱정을 하는 내가 싫었다.
나와 카페를 찾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카페가 없었다. 십분 걸어 큰 지하철 역으로 가면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 머물렀던 카페가 있는 걸 알지만,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페를 포기하고, 동네 안쪽 골목을 걸어보기로 했다.
동네는 조용했다. 애매한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주거지만 밀집되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여태 다녔던 곳들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높은 건물들. 그렇게 돌고 나니 이십여분이 남았다.
다시 집 쪽으로. 이번엔 길을 건넜다. 그러다 작게 숨어있는 카페를 발견했다. 외부 테이블과 의자들은 작은 텃밭? 에 숨어있었던 거다. 건물 자체도 옆에 다른 건물들보다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양새였다.
앉아서 에스프레소와 오렌지 쥬스를 시켰다. 주인아저씨는 병에 든 거 아니면 착즙? 이라 물어봤고 당연히 나는 착즙이요 !! 라고 대답했다.
커피도 너무 맛있었고 쥬스도 너무 맛있었다.. 이런 히든 플레이스를 이제야 와보다니.. 그래도 이제라도 온 게 어디야. 이번 집에는 커피 머신이 없었기에 오전에 커피를 마시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했다. 빵집에 들러 빵과 커피를 함께 사 오곤 했었지.
가방에서 꺼내지 못할 뻔한 노트북을 열었다. 작은 테이블이었고, 경사진 바닥면 때문에 테이블도 살짝 기울어 있었다만, 딱 좋았다.
한참 글을 쓰는데 알람이 울렸다. 이런... 남은 커피와 쥬스를 원샷하고 일어설까 하다가, 짐을 가지고 내부로 들어갔다.
실례가 안된다면 건너편에 짐을 가지러 다녀와도 될까요? 다른 제 짐은 여기다 두고 갈게요 !
아저씨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고 가방을 바 테이블 안쪽에 두고 가라 했다.
감사합니다. 금방 올게요 !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후다닥 뛰어갔다. 잉? 끝나 있을 줄 알았던 세탁기는 아직 9분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9분...? 통상 표현으로 10분 안에 온다고 했던 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탁기 문 앞에 비친 조급한 내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탁기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고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해’라는 식으로- 남겨진 시간을 표시하는 것도 오차 없이 정확하게 다 채워냈다.
8분, 7분, 6분, 5분, 시간이 이렇게 안 가다니..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했다. 근래 만난 십분 중 제일 긴 시간이었다.
4분, 3분, 2분, 1분, 0분... 끝 !
근데 이 세탁기 어떻게 열지..? 처음엔 문에 숨겨진 고리가 있나 해서 만져봤는데 없었다.
고개를 들고 세탁기에 있는 ‘start’버튼 외 모든 버튼을 눌렀다.. ㅋㅋㅋㅋㅋ 마지막으로 열쇠 그림이 그려진 노란 버튼을 누르자 내부에서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휴... 꺼내 든 빨래에선 뽀송한 냄새가 났다.
빨래 주머니를 들고 냅다 뛰었다. 어딘가에 짐을 두고 나온 적은 처음이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돌아와 맡긴 짐을 찾고, 고맙단 인사를 건넨 뒤 다시 자리로 왔다.
남은 커피에는 아직 온기가 있었고, 오렌지 쥬스는 건더기와 즙이 분리되어 있었다.
커피를 마저 마신 뒤 쥬스 컵에 같이 주었던 수저로 쥬스를 저었다.
쥬스가 섞이는 꼴이 꼭 세탁기 안에 내 빨랫감 같았다.
원래 쓰기로 했던 글을 두고 갑자기 빨래방에 다녀와 그걸 쓰고 있다. 이 즉흥적인 글을 다 쓰고선 원래 쓸 글도 쓰고서 자리를 뜨기로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유는 런던으로 넘어가서 부리자 생각했는데 꼭 그럴 거 있나 싶었다.
커피잔에 남은 설탕을 티스푼으로 긁어먹고선 같은 걸 한잔 더 시켰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늘 가볼 곳을 생각해두긴 했지만 꼭 이번에 안 가도 될 곳들이었다.
가볼 곳을 남겨두어야 다음번에도 파리를 고민해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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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오늘 가보고자 했던 곳을 다 다녀왔다. ㅋㅋㅋ
목적지들이 걸을 만한 거리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가는 길이, 골목들에서 구경할 게 참 많았다.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은 제일 별로였고,, 안 가봐도 되겠다 싶었던 곳들은 되려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열심히 걷고서 집에 와 고기와 버섯을 구웠다.
해 먹는 밥에 재미가 들린 것이다 ㅎㅎ 아, 카르네의 마지막 장도 알차게 잘 썼다.
처음 이곳에서 H와 요리를 해 먹으면서, 주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될 것 같다 했는데 정말 그랬다.
널어두고 나간 빨래 덕분에 집에선 뽀송한 냄새가 가득했다. 잠옷 소매가 좀 덜 말랐지만 뭐, 오늘은 밥도 푸짐하게 먹고 일찍 누울 예정이다.
다행히 캐리어엔 짐이 다 들어간다. 겨우 책 몇 권 산 것도 있고, 후드티 세장 중에 한장은 H의 편에 먼저 서울로 보냈기 때문이겠다.
맘 편하게 쉬려고 집에 오자마자 짐을 미리 쌌는데, 그걸 보니 내일 이 건물의 저 좁은 계단들을 내려갈 생각에 숨이 턱 막힌다..
짐이 많은 자여 오늘은 정말 일찍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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