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을 좋아한다

d+15

by regine

느지막이 눈이 떠졌다.

의도적인 건 아녔는데 시간을 보니 열한 시였다.

점차 시차 적응이 되는 건가.. 오전에 어제의 글을 쓰려했는데 오전이 많이 지나가 있었다.


우리 집 쪽 창에서 반사된 햇빛이 마주한 건물에 닿아있었다. 이전 집과 다르게 고개를 들어야 하늘을 볼 수 있다만, 이 집의 창문 너머 새로운 풍경도 그 나름대로 좋았다. 하늘엔 구름이 있으나 흐리진 않았고, 그 속에 파란색이 얼핏 보였다.



수요일엔 런던으로 간다.

느긋해지고 싶었다만 파리에서 이틀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고 하니 괜히 급해지는 것 같아 나를 다그쳤다.

급하게 굴지 말자. 급하게 굴어서 카메라를 잃어버렸... 이 얘긴 그만 해야지...



오늘도 잠옷 바람으로 나가 빵과 커피를 사 왔다. 계란과 라흐동을 구워 푸짐한 아침을 먹었다.

혼자서도 이렇게 ‘수고스럽게’ 먹고 있다는 게 웃겼다.

설거지 거리는 일 인분의 양이니 딱 절반이 줄어 있었다.

식탁을 정리하다가 꽃을 봤다.

목요일에 바스띠유 시장에서 사 와 꽂아두었던 튤립은 봉우리가 제법 벌어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 왔을 때 보다 안 예뻐 보였다.

봉우리가 다물어져 있어야 예쁜 꽃이라니. 나 말고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땅한 꽃병이 없어 계량컵에 물을 담아 꽂아두었었는데, 경험상 꽃이 클수록 담겨있는 물에 잔여물이 금세 쌓였다.

하룻밤 사이에 물은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나가기 전에 갈아야지 싶어 컵을 들었다. 후두둑.

꽃잎이 후두두 떨어졌다. 꽃줄기와 수술만 남았다. 이제 너도 보내줘야 할 때구나..



헌데 장미잎과 다르게 튤립의 꽃잎들은 아직 탱탱하고 색이 고왔다. 그래서 계량컵을 씻어 그 안에 꽃잎들을 담았다.

컵 하나로는 모자라 와인 컵을 가져왔는데 여기에도 한가득이 담겼다.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잘 어울리는 담음새와 컬러였다.

이런 것도 찍고 있다 보니 금세 한시가 넘었다.

그래도 글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고 나오니 두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목적지는 꽃을 샀던 동네였고, 가방을 샀던 동네였다.

그 목요일 들렀던 작은 갤러리였다. 그날은 시장을 들렀다 갔었는데, 다음 전시가 준비 중이라고.. 어쩐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비어 있었다기 보단 지렛차와 사다리 등이 있었지. 언제 여냐 물었더니 월요일에 열린다 해서 그럼 월요일에 다시 오겠다 인사를 하고 나온 곳이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이런 공간을 더 좋아한다. 무언가로 꾸며질 공간. 혹은 꾸며지고 있는 공간.

꾸며져 있는 공간은 곳곳에 널렸는데, 이런 ‘공사 중인’ 혹은 ‘변경 진행 중인’ 공간의 순간성에 더 끌린달까.

진행형 공간을 좋아한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예전 회사에서도 행사장을 꾸미게 되면 나는 미완성인 공간을 담느라 바빴다. ㅋㅋㅋㅋ

막상 완성된 공간은 - 비록 그곳도 며칠 뒤에 철거될 일시적인 공간이었다만 - 사진첩에 거의 사진이 없었다.

일을 하면서 자료로 꺼내봐야 했던 건 설치 후의 사진이었는데 그래서 그럴 때마다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몇 번의 전시를 거쳤다만, 사진첩에는 설치 중이거나 철거 중인 공간의 사진만 가득 남았지.


파리에 와서 들렀던 몇몇 공간에서 아직 전시가 준비 중이라고 하면, 아쉬운 마음도 있다만 그 내부를 힐끗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였다.

아마 사진첩을 추려보면 이걸로 만도 꽤나 많은 사진이 있을 것 같다.

거리에서 작업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현장 속에 있는 사람들. 길을 가다가도 그들에게 눈 길이 가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면 되려나?


다시 방문한 그 공간이 어떻게 채워져 있을지, 궁금해하며 벨을 눌렀다.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어준 사람은 지난 목요일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공간은 그때와 다르게 구석구석 채워져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 문을 열었을 때 보였던 건, 초입 한켠에서 무언가 설치 중인 사람이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 하고 올라갔다.

평소 같았음 질문을 했을 건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작업하는 사람과 그의 도구들에 자꾸 눈길이 간 탓이었다.



너무 의식한 것 같아 우선은 눈길을 의도적으로 그쪽으로 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작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별다른 각도 없이 네모나게 트여있는 공간이라 여간 힘든 일이 아녔다만,,

그런데 이렇게 깔끔한 네모 공간에 들어와 본 게 얼마만이더라, 머물던 집에서 조차 구석구석 특이한 모양새를 구경하느라 바빴었는데,

되려 이 곳에선 정말 전시된 것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그것들 자체만으로도 존재감들이 엄청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공간에는 장 푸르베가 디자인한 제품들이 주였고 그 외에 르 코르뷔지에, 샤를로뜨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거의 하루 건너 하루 듣고 보는 듯한 느낌...

그래도 피카소의 이름을 갑자기 듣게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걷다가 뭔가 신발 아래에 걸린 것 같아 보니, 마루 지킴이가 운동화 바닥에 붙어있었다. ㅋㅋㅋㅋㅋ 회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붙은 걸 떼내고 했는데 여기와 이런 상황을 만나다니 재밌고도 반가웠다.ㅋㅋㅋㅋㅋ


공간을 간단히 소개해주던 사람이 읽어봐도 좋다던 두꺼운 파일철로 정리된 도록을 펼쳤다.


첫 장에 무언가 나왔다. 내가 막 들어왔을 때 설치되고 있던 게 책상이었구나.

한참을 보다가 부스럭 거리는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의자 1개와 긴 철제봉이 옮겨지고 있었다.


어, 저건 아까 도록의 앞쪽에서 본 조명이었다.

설치를 하는 사람은 새로운 가구를 가져온 사람을 포함해서 두 사람이 되었고, 이윽고 나를 맞이해주었던 사람도 내려왔다.


셋이서 새로 들여놓을 의자와 조명을 바닥에 두고선 한참을 얘기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웠다.ㅋㅋㅋ

좋아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들뜸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인데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귀엽지 않을 리 만무했다.


설치될 조명까지 보고 싶었으나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두 곳이나 있었다. 그것도 각각 삼십 분 거리였으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온 시간이 이미 늦은 것도 있었고 들러볼 곳들이 6시에 닫기 때문이었다.


못내 아쉬워 나갈 때 까지도 한참을 있다가 이 사진이 찍혔다.

이 곳에 오늘 올지, 내일 갈지 보다가 이동이 멀고 빠듯해도 오늘로 넣은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다음 일정으로 발걸음이 바빠도 기분은 좋았다.




+

다음의 일정이란 남은 유로를 파운드로 환전하는 것이었고, 빌라 라로슈에 한 번 더 가는 것과 겨울왕국2 를 한 번 더 보는 것이었다.

일정은 무사히 잘 마쳤고, 영화 보러 가기 전 들렀던 와인 샵에서 내츄럴 와인도 한 병 사 와서 지금 마시고 있다.



아, 가는 길에 에펠탑 뷰로 유명한 샤오이 궁에 내릴 수 있는 트로카데호 역을 오며 가며 들렀는데, ‘

갈 땐 픽 포커 - 소매치기들을 현장에서 적발하는 걸 봤었다. 그리고 올 때는 아예 지하철이 그 역을 지나기 전에 멈추길래 뭔가 했더니

지하철 내 방송으로 ‘다음 역인 트로카데호 에서 소매치기들을 수색해내느라 우리 열차는 잠시 멈춰 있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양해 바랍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방송을 듣고 사람들은 웃었고 나 역시도 웃었다만.. 웃으면서도 씁쓸했다. 그래 너네 내 카메라 잘 쓰고는 있니.... 이 얘긴 진짜 그만....



빌라 라로슈와 겨울왕국2, 둘 다 두 번째였기에 (힌트) 여기에 대해서도 쓸 얘기가 떠올랐다만 이건 내일 해야지 !

세이브 원고까진 아니어도 주제를 미리 생각해 놓을 수 있다니..


오늘 사온 내츄럴 와인도 매우 맛있고.. 벌써 새벽 세시 인 것 빼고는 매우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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