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샀다

d+13

by regine

검은색, 흰색 / 남색-파란색 / 회색 / 카키색-초록색...


내가 좋아하는 컬러 순으로 적어보았다.

어렸을 때 아빠 책상에 놓여있던 컬러칩을 가지고 참 많이 놀았었는데, 어쩌다 그 많은 컬러들 중에 저 컬러들만 남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물건을 구매할 때 컬러를 골라야 한다면 주로 위의 저 나열된 순으로 선택을 한다. 검은색이 압도적이라 그 외 컬러들은 슬래시로 구분을 해놓았다.

어떤 날엔 검은색 가방 안에 든 소지품도 죄다 검은색인 날도 있었다.ㅎㅎㅎ


재미있는 건, 내가 갖고 있는 검은색은 다 다른 검은색이라는 거다.

‘같은 검은색’이 없다고 느껴서인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컬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젠 다른 컬러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는 중이랄까.



이틀 전엔 붉은색 가방을 구매했다.

붉은색이라는 표현은 검은색에 비해 모호하고, 그렇게 통칭되기엔 또 다양한 컬러들과 그 이름들이 있겠다만 내겐 낯선 컬러인지라 그렇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에서 발견한 거였는데, 컬러 옵션은 검은색과 붉은색 두 가지였다.

근데 왠지 망설여졌다. 평소대로라면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검은색을 골랐을 텐데 말이지.

늘 내가 선택하던 컬러를 고른다면 무난한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붉은색 가방을 고른 건, 이런 망설임을 갖게 되는 상황을 줄 만큼 예쁜 색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 버건디 빛을 띠는 베지터블 가죽. 미세한 긁힘에도 상처가 쉽게 나겠지만 그런 특성 역시 좋았다.


사실 이 가방을 구매하게 된 건 컬러를 떠나, 베지터블 가죽 소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만듦새를 가지고 있는 가방이라서였다.


언젠가 친구와 같은 디자인의 지갑을 사게 되었는데, 한참이 지나 보니 친구의 지갑과 내 지갑은 그 위에 새겨진 흔적도, 전체적인 컬러 감도 매우 달라져 있었다. 서로의 지갑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서로의 사용 패턴을 뒤따라가 보니, 친구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보단 지갑만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해 지갑에 손때가 묻어 더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고 반면에 내 것은 여러 물건들과 지갑이 가방 속에서 뒤섞여 표면 위에 언제 새겨진지 모를 자국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같은 지갑인데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모양새가 퍽 멋져 보였다.

쓰면 쓸수록 자국들은 깊어지거나 더 많이 생겨나게 될 텐데, 그제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지. 내 돈으로 산 건데 되려 나만의 것을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가죽이란 소재에 대해 취향이 생겼던 것 같다. 외부 환경에 민감한 편인 베지터블 가죽이라면 더 구미가 당겼다.


좋아하는 만듦새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음 뭐랄까, 가방 몸체와 손잡이 / 어깨끈 이음새에 대한 얘기다.

그 부분이 가죽으로만 연결되거나, 기타 소재의 부속물이 최소로 사용되어 만들어진 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만듦새다.

헌데 생각보다 이 기준을 통과하는 가방이 많이 없더라. 물론 가방 제작자들이 미적 부분과 동시에 기능성 부분까지 고려한 결과겠지만... 연결 고리끼리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라던가 가죽을 만지다 금속 부속을 만지는 느낌이란, 내게 그다지 반가운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이 있다면 애초에 눈길을 돌려버렸다. 한데 생각보다 이 기준을 통과하는 가방이 많이 없더라. 겨우 한 두 개 발견할까 말까였다.

이런 유난을 떠는 나에게 누군가 직접 만들어보라 했지만, 내겐 그게 더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가방이란 게 ‘필수재’는 아니지 않나. 내겐 '물건을 담아 다니는 용도'의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특정한 기준을 갖게 되는 건, 그리고 그걸 찾는 과정은 어렵고도 재밌다.


패브릭 가방을 만들어 본 적도 있지만, 그건 그런 가방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으로 무언갈 만들고 싶었던 거였기에 진행된 일이었다.

웃긴 건 나는 내가 만든 제품의 홍보나 영업에는 영 젬병이었다는 거다.. 내가 만들었다 해도 재단부터 프린팅, 재봉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기에 내보이고 싶은 마음보다는 신기하고 고마움이 우선적이라 그랬나 보다.




사실 가방뿐만 아니라 내가 입고, 먹고,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소비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나 ㅎㅎ 다만 내게 필요한 건 생각하는 기준에 최대한 가깝게 있는 물건들을 잘 고르는 눈이었다. 그런 물건이 눈에 들어왔을 때 놓치지 않을 구매력도 뒷받침되어야 하겠고 ㅎㅎ

이렇듯 취향이란 게 소비의 기준이 되어 내가 무엇을 소비할지에 대한 부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다 보니, 내가 가진 물건을 보고 ‘이건 딱 네 것이다’라는 피드백이 늘어났다.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거 네겐 안 어울려’ 보단 긍정적인 뉘앙스라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가방을 사고 나와 들른 카페에서 곧장 포장을 풀었다.


나는 늘 짐이 많다 보니, 기존의 가방에서 꺼낸 것들은 새로운 가방에 다 들어가지 못했다. 여행용 지갑은 여권을 넣는 곳도 따로 있어 그것도 차지하는 자리가 꽤 컸거든. 그리하여 지갑과 핸드폰, 림밤과 교통카드, 집 열쇠만 새 가방에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짐은 접힌 장바구니를 펴서 그곳에 넣고 다녔다. (여행 와서까지도 장바구니까지 들고 다닌다..) 덕분에 이 가방을 멘 날은 챙겨야 하는 가방이 두 개. 생각보다 번거롭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딱 필요한 것만 넣어지다 보니 교통카드를 찾거나 집 열쇠를 찾을 때 멈추어 서서 가방 속을 허우적 대는 상황이 줄었기 때문이다.



베지터블 가죽으로 만들어져 몸체와 가방 끈이 가죽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내부에도 지퍼 대신 안 보이는 곳에 가방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자석이 내장되어 있어 가죽 외 소재가 최소한으로 쓰인 가방.

내가 정확히 찾던 만듦새를 가진 가방이었기에, 잠깐의 컬러 고민만 한 뒤 들고 나오는 데에는 삼십 분여도 걸리지 않았다.

우연히 들렀던 가게지만, (그곳은 심지어 가방 전문샵도, 가죽 전문샵도 아니었다.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나 수저가 가득했던 곳이었고, 가방은 구석 안쪽 윗 선반에 놓여 있었다.) 컬러 옵션을 고민한다는 단계 자체가 이미 ‘살 건지’를 정한 다음이었던 거였다. 지금 와보니 가게 이름조차 기억에 없지만, 이런 가방을 만들어 줘서 - 판매를 해줘서 고마운 곳으로 기억될 곳이다.



여행이 끝나고 이 가방에 새겨질 자욱들은 어떤 기억을 남길까.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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