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르뚜가 Oct 06. 2022

오늘, 퇴사하고 싶습니다.

어느 사무직 직장인의 오후 4시 산책 

"퇴사하겠습니다."


광복절 연휴 다음 날 전무님께 말했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는 있었다. 회사의 영업이익 실적은 계속 나빠졌고, 불가피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엔 구조적 한계가 많이 보였다. 앞으로 더 다닌 들 비전이 있을까 하는 고민은 사실 몇 개월째 계속하던 중이었다. 이건 이성적인 이유고, 감정적 이유로는 같은 층에 근무하고 있는 4년 만난 남자친구와 광복절날 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사상 최악의 불경기, 치솟는 물가, 미친 환율까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식들은 넘쳐났지만 그래도 도망치고 싶었다. 


한동안 이사님, 전무님, 대표님과의 릴레이 면담이 계속되었다. 창과 방패의 싸움 같은 대화가 이어지던 중 회사에서는 내 커리어에 한 줄을 추가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제안해주었다. 퇴사하면 바로 이직하는 게 아니라 당분간 좀 쉬고 싶었는데, 딱히 다음 플랜이 없던 나에게 몇 개의 제안은 그 와중에 퍽 솔깃하게 들렸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보류하게 되었다. 


내 결정으로 남았지만 한 번 붕 뜬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제안받았던 '기회'가 물거품처럼 느껴지는 오늘 같은 날에는 벼랑 끝의 갈대처럼 마음이 좌로 우로 위태롭게 흔들린다. 업무시간은 철저하게, 매사 열심히 일하는 FM성향의 나도 '될 대로 되라지'하는 마음으로 회사 근처 한 바퀴 산책을 다녀왔다. 그런데도 일 할 기분이 나지 않아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끄적인다. 혼자만의 설명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이 글은 퇴사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오늘의 산책에 대한 소회랄까. 


사무직 직장인에게 오후 4시의 일상 풍경은 낯설다. 회사 근처엔 인테리어, 건축 자재를 취급하는 도·소매점이 많다. 4시가 넘어가니 이제 하루를 정리하는 곳이 많았는데 이게 묘하게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인테리어 업체를 하셨는데 딱 이때쯤 하루를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잊고 있던 추억이 내 모든 감각을 뻥하고 열어 준 느낌이랄까. 하루 끝을 마감하면서 가게 옆에서 담배 피우는 거래처 아저씨들, 그 옆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들어주는 업체 사장님, 이른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 선선한 저녁 공기에 섞인 자동차와 오토바이에서 이는 살짝 매캐한 먼지 냄새까지. 평소 내 퇴근길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 역시 사람은 가끔 낯선 것들을 마주해야 살아있다고 느끼나 보다. '너무 지친다. 기회고 뭐고 그냥 퇴사할까?' 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떠난 산책 치고는 별걸 다 깨닫고 돌아온 하루였다. 


글을 끄적이고 있는 지금 창 밖은 깜깜하다. 새롭지 않고 너무 익숙한 나의 퇴근길 풍경. 대책 없이 퇴사하면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결심은 했지만 불안과 고민은 반복된다.  

 

그래도 여전히 퇴사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이럴 수가. 언어 능력이 퇴화되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