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쓸어버린 임진(壬辰)년의 기록
나는 오랫동안 이 시기에 대해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것을 피해 왔다.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던 시기. ‘자아가 붕괴되었다’라고 정의한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가라앉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좀처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때를 복기하며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왜 나는 그렇게까지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을까.
해답을 찾을 수 없던 내게 명리는 그 해가 수(水)의 기운이 가득 넘쳐흘렀던 때라고 알려주었다. 임진(壬辰)년. 그 해는 갑자기 불어난 물이 내 안의 흙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것과 같았다. 거기에다가 물을 머금은 변화무쌍한 땅의 기운도 함께 들어오며 흙을 자극하니, 내 약한 기토를 든든하게 받쳐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홍수 위를 표류하다가 결국 축축한 진흙에 빠져 끝없이 가라앉을 수밖에.
그런데 당시의 나는 내가 그렇게 망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말하자면, 출렁이는 파도 위 무너지는 조각배 위에서 파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나답지 않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시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그게 대학 4학년에야 찾아왔다는 게 비극이었다. 1년 휴학 끝에 4학년으로 복학하는 때였으므로 당연히 졸업준비와 취업준비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휴학 전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설득으로 덜컥 동아리 활동을 이어가고 만다. 이게 내게 들이닥친 모든 균열의 시초였다.
전공과목을 잘못 선택해서 학과수업도 따라가기 벅찼고, 다시 돌아간 동아리 활동은 즐겁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기에서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이 따라가는 방향을 너무 순수하게 믿어버렸다. 그게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뜬금없이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상대는 군입대를 70여 일 앞둔 동아리부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연애는 감정의 충동에 따른 즉흥적인 시작이었다. 동아리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친해졌고, 나와 결이 같은 사람으로 보였기에 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날 수도 있었다. 원래의 나는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도 아니었고 연애를 갈망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움튼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곧 사그라들 거라 여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졸업 준비를 하는 4학년이었고, 그는 곧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와 사귀기로 했고 하필 그때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복학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적 장학금을 받을 만큼 학과 공부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는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자 내 일상의 균형도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시기의 나는 분명 즐거웠다. 아니, 즐거웠다고 믿었다. 학교는 데이트 장소가 되었고 붕 떠버린 마음으로 학과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보냈다. 당시의 내게 가장 중요했던 건 곧 입대를 하는 그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거기에만 몰두한 탓에 다른 일들은 모두 뒷전이 되었다. “너 왜 이렇게 달라졌어?” 지나가는 듯이 던진 과 동기의 말이 그때의 나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땐 흘려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칭찬이나 응원이 아니라 ‘안 하던 짓을 한다’는 일침이었다.
거기에다가 그는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당시에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느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내가 좋으니까’로 쉬이 넘겨버린, 그러나 넘기지 말았어야 할 신호들. 그 신호들 사이에서 의문과 의심이 피어오르던 때조차도 나는 그와 사귀기로 한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나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랑받는다는 착각에 휩싸여 정작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는데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어쩌면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감정의 물살에 쓸려 사랑한다고 믿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단단하게 잡혀 있어야 연애라는 물살이 흘려들어와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시기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중심을 잡아줄 기운도 없이, 연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쉬이 흔들리는 사람. 그게 나였다.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 이렇게 쌓여간 말들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침식해 갔다. 그 작은 균열들이 쌓여 결국엔 관계마저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부서진 마음을 주워 모으면서도 내 마음만은 진실하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질척해진 땅에 수(水)의 기운만 내리 꽂혀버리니 흙이 숨 쉴 구멍이 없었다. 내가 바라던 것은 작은 온기뿐이었는데도 그 어디에도 화(火)의 기운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무너져갔다. 무너지는 줄도 모른 채 물은 점점 차올랐고 어느새 숨이 막힐 만큼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사진: Unsplash의 Eduardo Drap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