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뿌리내린 땅에서의 생존기
감정의 붕괴는 관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국 가장 크게 무너진 것은 내 삶의 형태였다.
나는 4학년으로 복학하며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조기졸업도, 장학금도. 대학생활 내내 받아본 적도 없는 낮은 학점을 받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도, 그의 입대가 정말 코앞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며 시간마저 흘려보내버린 그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단순한 감정의 격랑이 아니었다. 수(水)는 본래 일정한 형태가 없다. 잡으려 하면 빠져나가 버렸고, 붙들고 있기엔 내 땅이 아직 단단하지 못했다. 나는 그 해 그렇게 잡히지도 않고 감당할 수도 없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니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이탈한 궤도는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미 휩쓸린 채 중심을 잃어버린 나의 땅, 기토는 스스로를 다시 일으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그렇게 한 해의 절반이 흘러갔다.
그 해 여름이 무르익어 갈 즈음 그는 입대를 했다.
망한 학점을 복구하려면 계절학기라도 들어야 했지만,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그의 입대 전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 써 버렸다.
그가 입대한 뒤엔 훈련소로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다. 우습게도 다시 못 볼 사람을 떠나보낸 것처럼 그렇게도 많이 울었다. 흘러넘치는 감정들을 편지지 위에 꾹꾹 눌러 적는 동안 그 해의 나머지 여름이 지난하게 지나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부재가 남긴 습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수많은 편지들은 그를 위한 서신이라기보다 내 감정에 내가 잠식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기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고, 나는 마지막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 망쳐버린 학점을 수습해야 했으므로 더욱 학업에 열중했다. 홀로 학교를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전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남자친구가 곁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학생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도 뜬금없이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이전의 나는 혼자서 밥 먹는 일 같은 것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람이었는데도.
외로움, 쓸쓸함 같은 감정을 알아버린 나 자신에게 이질감이 들었다. 이런 나 자신이 낯설고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라는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했다.
이제 정말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진흙 속에 깊게 파묻혀 있다가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디디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꾸 무너져내리는 발밑에 끌려내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조금씩 나아갔다. 졸업논문을 썼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봤다.
졸업논문을 제출하러 가는 길의 발밑은 온통 노란 은행잎 천지였다. 그해 봄에 유행했던 노래처럼, 그렇게 나도 벚꽃잎처럼 울려 퍼질 줄 알았던 계절로부터 어느덧 멀리 와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으므로 대학원 진학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선택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던 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정의 수몰 상태에서 졸업을 앞두었다는 조급함과 취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엉켜 있었고, 나는 그 모두를 ‘대학원’이라는 해답으로 덮어두려 했던 것 같다.
중심을 잃고 흐트러진 땅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구조물을 세워둔 것, 그게 바로 대학원 진학이었다. 합격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그래도 완전히 주변부로 밀려나진 않았다’는 얄팍한 위안을 얻었고, 지인들로 하여금 정상 궤도를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대학원 진학이 확정되고, 졸업논문이 통과되고, All A+를 새긴 마지막 학기 성적표를 받고서야 내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다시 일어선 나’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았다는 착각 속의 나’였다.
나는 살아남았지만 살아내진 못했다.
그때의 나는 ‘단단해진 땅’이 아니라 그저 ‘잠시 마른 진흙’ 위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그것이 내가 제대로 살아갈 방향이 아니라 떠밀리듯 맞이해야 했던 다음 파도였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사진: Unsplash의 Uladzislau Petrushkev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