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기만과 회피로 흘러든 시간들
비록 도피의 성격이 있었을지라도 나름의 포부를 지니고 선택한 대학원 진학이었다.
하지만 학업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조교 업무와 학회지 간사 업무에 짓눌리며 내 연구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기만 했다.
나는 그저 빨리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를 받아 이곳을 탈출하고만 싶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어떻게든 뼈대를 세워보려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2년 반이 지나고 나는 어찌어찌 마무리한 논문과 함께 석사모를 쓸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못한 채 나는 학교를 등지고 나왔다.
그즈음 내 삶의 기후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주명리학에서는 이를 대운(大運)이라고 부른다. 대운은 10년 단위로 바뀌는 인생의 큰 흐름을 뜻한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10년 단위의 장기적 기후이다. 즉 대운이 언제 어떤 성질로 들어오는지에 따라 삶의 기온과 결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내게 들어오는 대운은 ‘을해(乙亥) 대운’이었다.
겉으로는 유연하게 자라나는 풀줄기(乙木)와 고요하지만 생명력을 품은 바닷물(亥水)의 조합처럼 보였다. 어떤 이에게는 이 기운이 지적 성장과 내면의 확장을 이끌어주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겐 달랐다.
나의 땅 기토는 이미 물기를 가득 머금어 눅눅하고 축축한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진 물의 기운은 조력이라기보다는 침식이었다. 대운이 가져온 생명력의 힘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함께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닷물은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며 10년을 버텨야 했다.
이 을해대운이 시작된 첫해에 내게 세운(歲運)으로 화(火)가 들어왔다.
세운은 1년을 관장하는 운이다. 대운이 삶의 기후라면 세운은 날씨와도 같다. 그때 내게 찾아온 화(火)는 강렬한 태양이자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눅눅하고 축축한 땅을 데워주고 말려줄 수 있는, 내게 가장 절실했던 기운이었다.
비록 1년짜리 운에 불과했지만 그 해의 화(火)는 차가운 바닷물이 서서히 발밑을 적시고 뿌리덩굴이 발목을 옥죄는 와중에 잠깐 내리쬔 햇살과도 같았다. 유일하게 나를 살릴 수 있는 가느다란 생명의 불씨였다.
나는 그 한 줄기 빛이 무언가를 바꿔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딛고 선 땅은 여전히 질퍽했다. 나는 그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가라앉고 있었다.
화(火)의 기운이 불러와 준 생명줄을 잡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작가로 살고 싶었다. 글쓰기가 침잠하는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으며 매일 키보드를 두드렸다.
운이 좋게도 그 믿음이 바로 결과로 되돌아왔다. 첫 글부터 반응이 있었고, 여러 곳의 출판사에서 출간제의가 왔다. 역시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갈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 글도, 그다음 글도 얼마든지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포부가 솟아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출간계약이 된 글의 마감기한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편집자님께 사정해 마감기일을 늦추며 자책과 무기력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보았던 밝은 빛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의 눅눅함을 단숨에 말려버릴 것 같았던 따뜻한 불의 기운은 어느새 흔적만 남아 있었다. 내 땅을 밝게 비추던 햇빛이 서서히 구름에 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빛을 받아 생동하던 문장과 이야기는 사라졌고 겹겹이 쌓인 구름과 안개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한 글자라도 써보려고 억지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빈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뭐라도 써보고자 짜낸 문장들은 이내 곧 백스페이스의 연타로 사정없이 지워졌다. 그렇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나는 왜 이전처럼 쉽사리 쓰지 못했을까. 계약한 글이니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잘 팔려야 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그런 것들이 부딪쳐 오히려 극단적인 회피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마음만큼 따라오지 않는 활자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엉켜만 갔다.
겨우겨우 글을 완성해 출판사에 초고를 보내 놓고도 숨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보이지 못할 글을 써냈다는 자괴감. 나는 결국 이런 인간밖에 못되었다는 좌절감. 이런 것들에 휩싸여 내 필명을 떳떳하게 내보이지도 못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를 감싸 안았던 빛과 온기를 누린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나는 비겁한 인간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드디어 작가로 밥벌이를 하고 살게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떳떳하지도 못했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패배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도 없이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지만 헛짓은 하지 않고 있다고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스스로 중심을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의 내면에서는 강도 높은 지진이 나고 있는데 겉으로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내 안의 균열을 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멈출 수 없었다.
사진: Unsplash의 Mick Hau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