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가 건져낸 내 삶의 한 때
2021. 5. 27. 1:00
아무리 빨리 걸어도 평온한 심장이 두 발을 동시에 땅에서 떼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요동친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심장이 뛰는 게 오롯이 느껴지니까.
심장이 뛴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
달리는 순간 나는 온몸으로 生의 기운을 내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해 전부터 내게 흘러든 기운은 눅눅함 그 자체였고, 뭘 하려고 해도 물을 가득 머금은 솜처럼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저 달리기만 했다.
한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한 거라곤 달리기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기라도 했다고 고쳐 말하고 있다.
나는 달리면서 그 시기를 살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달렸기에 지금의 나에게 닿을 수 있었다.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게 체육 시간이었다. 체육이 든 날에 비가 오면 마음이 놓였을 정도였다. 달리기는 특히 내게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걸어서도 충분한데 왜 굳이 달릴까, 그것도 속도를 내면서. 달리기 꼴등은 언제나 내 차지였고, 달리는 것에는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리기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체육 시간의 부끄러움으로만 남아 있던 달리기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던 순간이었다.
이제 달리기를 하며 등수로 매겨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나만의 레이스에서는 일등도 꼴등도 없을 테니까.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며 달려도 된다는 것. 달리기엔 어떠한 기준이나 정답이 없다는 것. 나는 그 점에서 처음으로 달리기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헬스장 러닝머신은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금세 지루해졌다. 어느샌가 계기판의 숫자만 노려보며 달리게 되었고 헬스장의 갑갑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나무로 빙 둘러싸인 동네 공원의 1.2km 원형 산책로는 달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나무들이 내뿜는 산소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달렸다.
30분 달리기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러닝 어플의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랐다. 1분 달리고 1분 걷기부터 시작해서 30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데까지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왜 나는 침잠했던 시기를 지나며 달리기로 그때를 ‘살아냈다’고 정의했을까. 달리기는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체력이 늘고 체중이 소폭 줄어드는 성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한창 달릴 때의 일기에도 남아 있듯이, 내가 달리기로 얻은 것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속도를 내자마자 단번에 180 이상까지 올라가는 심박수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러닝 프로그램의 카운팅을 따라 꾸역꾸역 조금만 더 달리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순간. 목표한 지점에 다다르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멈춰 섰을 때 밀려오던 뿌듯함. 1분 달리고 1분 걷기를 반복하던 내가 10km 마라톤에까지 나가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완주해 냈을 때 온몸을 감싸던 성취감. 그런 것들이 자꾸 나를 다시 달리게 했다. 나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감각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때에, 달리기는 내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지펴주는 불씨가 되었다.
나는 애초에 운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리 달려도 달리기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여러 해를 거듭하며 꾸준히 달렸지만 페이스는 그다지 빨라지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욕심을 내서 빠르게 속도를 높이면 바로 부상이 따라왔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달리기에 대한 나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이제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내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준까지 욕심을 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만의 페이스로, 지치지 않을 만큼만 오래도록 지속하는 것. 그건 내가 지향하는 나만의 삶의 결을 닮아 있었다.
달리기는 걷기와 다르다. 두 다리 모두 지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이다. 중력에 의해 다시 다리는 지면으로 되돌아오고, 그 지면을 힘차게 딛으며 다시 공중으로 뻗어 나간다. 순간 붕 떠있어도 다시 나를 단단히 붙들어주는 땅이 있다는 것. 그걸 박차고 나아가며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게 내게 위안이 됐다.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땅이 내 발밑을 언제나 지지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망설임 없이 달리게 했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심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좀 더 가쁘게 끊임없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여름에는 한밤중에 달려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땀은 비 오듯 쏟아져 옷을 흠뻑 적신다. 가쁜 숨, 온몸에 피어오른 열기와 땀. 이 모두가 한 점으로 모이며 찌르는 통증처럼 나를 깨웠다. 내게 눅눅하게 들러붙어 있던 습기를 걷어내고 마침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리기는 끝없는 수렁에 빠질 뻔한 나를 건져 올려준 구원줄이 되어 있었다. 내가 달리기를 했다고, 아니 달리기만 했다고 기억하는 시기는 내가 꺼리는 기운이 겹겹이 들어왔던 때였다.
내게 필요한 기운인 불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싶어도 불씨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때, 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달리기를 통해 스스로 불의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피워내듯,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나가며 내게 질척이던 뿌연 시간들을 조금씩 내몰았다.
어떻게 단순한 취미 활동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달리면서 생존의 실마리를 찾았고 그게 나를 되살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땅 위를 달려 나간 발자국마다 조그마한 온기가 따라붙었다고. 결국 그 온기가 내게 눅진하게 들러붙었던 무기력을 한 꺼풀씩 벗겨내주었다고.
그래서 달리기는 더 이상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작지만 단단한 발화점이었다.
달리기는 나도 모르게 내가 스스로 불러들인 화(火)의 운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차갑고 축축한 계절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화(火)의 기운이 일 년 내내 들어오던 해는 내게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그때를 지나왔을까.
미약하게나마 스스로 화(火)를 불러내며 버텼던 몇 해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짙고 강렬한 불의 기운이 관통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병신(丙申)년. 그 해는 세운(歲運)으로 병화(丙火)가 들어오던 때였다. 명리를 모를 때조차도 ‘인생에서 한 두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해’라고 기록해 둔, 내 인생의 가장 선명한 변곡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