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말들
나는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 내놓은 글은 단 한 편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더 이상 쓰지 못하는, 작가인 척하는 백수가 되는 걸까. 그런 자괴감이 들면서도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계약작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닌 말로 만들기 위해 쓰고 또 써 봤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결과물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굴레에 갇힌 채 자기혐오의 깊은 수렁에 빠지면서도 나는 작가라는 나의 정체성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쓰지 못하는 작가도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쓰지 못하면서도 쓰고 있다고 둘러대는 행위 자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아직 붙들고 있다는 미련 아닌가.
여전히 나의 문장들은 내려앉을 곳을 못 찾은 채 허공에서 빙빙 맴도는 중이었지만 그 사실이 역설적으로 내게 얄팍한 위안이 되었다.
나는 지금은 못 써도 언젠가는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능성만이 나 자신을 작가로 남게 해 주었다. 내가 정말 ‘못 쓰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내가 먼저 도망가버리는 것 같았다. ‘쓰고 있다’는 거짓말은 작가라는 나의 오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 처음이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없고 나조차도 문장으로 정리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언제까지나 꽁꽁 숨기려고 했던 나의 치부였기에 더욱 그랬다. 오랫동안 꺼내지 못했던 나의 부끄러움, 외면한 채 묻어두기만 했던 지난날을 이제야 인정하고 바깥으로 꺼내는 중이다.
이 이야기를 지금 문장으로 다듬어 내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제는 쓰지 못하는 작가로 머무는 삶을 그만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를 고백하는 이 글 자체가 바로 내가 다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첫걸음이다. 이 모든 시간이 더 이상 내가 지금 사는 ‘현재’가 아닌, 이미 살아낸 ‘과거’가 됐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연재하는 이유다.
쓰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내는 중에도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제일 먼저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다. 인세만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로 돈벌이를 못하는 사람도 작가라고 불러주는가. 하지만 나는 쓰지 못하는 중에도 늘 쓰고 있었다. 아니, 쓰고 싶었다.
변명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쓰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 있었다. 그래서 글감의 재료를 찾기 위해, 경험의 저변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일부러라도 바깥으로 나돌았다. 글도 못 쓰는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느니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 자신이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선이 자꾸 외부로 향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내면을 채우지 못했고, 그래서 내 감정과 기운이 밖으로만 흘러갔던 것이 아닐까.
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텅 비고 메마른 나 자신만 만날 뿐이어서, 결국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극들로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려 애쓴 결과였다.
때마침 덕질은 그럴듯한 돌파구가 되었다. 여러 공연예술 장르에 발을 들이며 새로운 세계와 만났고, 현실에 스며든 환상이 건네는 도파민만을 애타게 좇아 다녔다.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자 카메라를 들었다. 찍덕질을 하며 누군가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남기는 것에 열중하게 된 건, 내가 나만의 언어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내 손으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확실히 덕질은 내게 분명한 즐거움을 주었다. 덕질로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좋았다. 어떤 면에서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감각의 한 부분을 채워준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의 나는 겉보기엔 멀쩡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헐적인 즐거움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자책과 무기력의 나날이 파고들었다. 나는 여전히 나다운 언어,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장을 못 쓰고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이 시기를 단순히 우울했다고 정의하기엔 모호하고 복잡했다. 차라리 감정의 감도 자체가 무뎌졌다고 해야 할까.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은 평온했다. 비록 글은 쓰지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나날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지냈다.
그러나 그런 희미한 평온함이야말로 나를 더욱 침잠시키는 기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기신(忌神) 운이 거의 다 지나간 지금에 이르러서이다.
명리학에서 기신(忌神)이라는 단어는 꺼릴 기(忌)를 쓴다. 말 그대로 내 본성이 꺼리는 기운이라는 뜻이다. 내 기운에 악영향을 주거나, 사주의 조화를 깨트리는 운을 기신운이라고 한다. 이때 내게 들어온 대운, 즉 10년 동안 들어온 운은 내게 명백히 기신운이었다.
나는 이 10년을 겪으며 기신운이 반드시 외부에서 나를 해하는 재난의 형태로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 대운으로 들어왔던 기신운, 해수(亥水)는 갑자기 덮쳐 오는 파도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발밑을 적시며 들어오는 바닷물과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부유하고 있었는데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가운 바닷물에 잠긴 손끝과 발끝이 동상 직전까지 얼어붙었는데도 ‘그래, 이렇게 눅눅하게 살지 뭐. 나쁘지 않잖아.’하는 식의 체념으로 이르고야 만 것이다.
가끔 이렇게 살다가는 영영 한 글자도 못 쓰고 가난하게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무기력의 수렁에서 나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하다못해 정신과의 문이라도 두드렸어야 했지만, 이 무기력에 너무 익숙해진 나로서는 그럴 힘도, 또 그럴 돈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온몸으로 온기를 껴안고 싶었다. 얼어붙은 손가락을 데우고 다시 글을 쓰는 데에까지는 나가지 못해도, 바다 한가운데에서 헤엄쳐 나와 다시 땅을 짚고 걸어가고 싶었다.
어느 날 내게 일어난 아주 작은 일상의 변화 하나가 그 바람을 서서히 현실로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뜻밖에도 달리기였다.
사진: Unsplash의 Cristian Pal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