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걸음을 멈추고 담아오는 어떤 것
오래간만에 퇴근 후 저녁 약속이 있었다. 주차를 하기 애매할 것 같아서 차를 두고 지하철로 이동했다. 끝나고 9시 쯤 되어 돌아오는 길, 지하철 역 앞 길가에 딸기와 사과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냥 지나쳐 길을 건너 가려던 나는 다시 돌아가 딸기가 얼마냐고 물었다. 사실 지갑에 현금도 없었는데 말이다.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쌓여 있는 딸기는 사이즈별로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가격을 조금 깎아 주겠다는 아저씨의 말에 하나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딴 거라며 두 개 하면 안되냐, 냉장고에 두면 일주일도 거뜬히 먹는다 하였다. 두 개 담아달라 하고 계좌이체로 값을 치른 후 검정 비닐 봉지에 담긴 딸기를 들고 집으로 걸어왔다.
뭐하러 딸기를 이렇게나 많이 샀을까. 늦은 밤 시간 아직도 딸기를 많이 쌓아두고 손님을 부르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를 지나치지 못했을 수도, 두 개 하시면 안되냐는 아저씨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시험 기간을 통과하고 있는 딸이 좋아하는 딸기를 사들고 가면 조금이나마 힘이 날까 기대했던 마음도 없진 않았을테지.
어렸을 때 아빠는 퇴근 길에 이것 저것 많이 사오셨다. 나와 동생, 엄마를 위한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때로는 치킨 같은 것들. 아빠는 퇴근이 늦은 편이셨는데 주로 9-10시 쯤 집에 돌아오셨다. 아빠가 뭘 사오는 날은 늦은 시간의 간식이 허락된 날이다. 방바닥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고, 나와 동생은 내복차림이다. 오래 전이지만 아빠가 밖에서 묻혀 온 찬 기운과 집 안의 따뜻한 공기가 섞이는 느낌. 내복을 입고 느슨해진 마음으로 비닐 봉지를 받아들던 설렘. 평소와는 다른 특별해진 일상의 기분까지 저 깊은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행복한 기억이다. 아빠보다 아빠 손에서 건네지는 비닐 봉지를 더 반길 남매의 환호를 떠올리며 아빠의 퇴근길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을까.
집에 가져와 열어 본 딸기는 아저씨 말처럼 오늘 아침에 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맛은 좋았다. 오랜만에 아낌없이 잔뜩 씻어서 실컷 먹었다. 아저씨는 몇 시까지 거기에서 딸기를 팔았을까. 많이 팔고 집으로 일찍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아빠처럼 집에서 기다릴 가족을 위해 검정 비닐봉지를 흔들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또 있었을까. 나의 발걸음을 돌려 세운 건 어쩌면 어린 시절 내 손에 건네진 아빠의 퇴근길 검정봉지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