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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May 19. 2020

그림이 내게 말해준 것

천천히, 한 번에 그릴 순 없어

많은 보고서를 쓰게 되면서 자료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된다. 일단 볼지 안 볼지 모르는 자료지만 모으고 보는 그런 집착 말이다. 이런 집착 때문에 콘퍼런스에 한번 참석을 하면 시시때때로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한다. 이 순간을 잊지 말기 위해 아등바등 애쓴다.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복제하듯 순간을 수집하고 인간 복사기처럼 빠르게 어딘가에 옮긴다. 노력 대비 빠른 완성을 추구하다 보니 꼭 그 자리에서 완성해야 속이 풀리곤 했다. 그러던 나도 그림을 그리면서 빠른 속도, 빠른 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어 유화를 그려보았다. 유화는 오일로 그리는 그림인데 캔버스에 그려 마르는 속도가 더딘 편이다. 건식 재료, 예를 들어 목탄, 연필과 다르게 종이에 그리면 완성되는 게 아니다. 마치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오일을 겹겹이 쌓아 만든 그림이다. 마르는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내 경우 최소 3주 이상은 걸렸던 것 같다. 뭐든 한 번에 끝장을 보는 내 성격과는 도무지 맞지 않은 그림이지만 그릴 때마다 쌓아지는 깊이감 때문일까. 한번 유화에 맛을 들이면 계속 다음 작품, 다다음 작품도 유화에 손이 간다.       


천천히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이라 가장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은 대상이 그림 그리기에 좋다. 엄마 아빠 얼굴, 신혼 여행지, 맛있는 디저트와 같은 추억들이 그렇다. 우리 집에 걸어 놓기 위해 신혼여행지 한 곳을 선택해 붓질을 시작했다. 빨리 후다닥 그리기보단 어차피 이 그림은 천천히 완성될 그림이라는 전제를 안고 시작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먼저 초벌을 시작한다. 물감과 물감이 깊게 엉켜 붙기 위해 비슷한 색으로 한 겹 깔아 올린다. 이렇게 초벌을 한 다음 1주일간 말렸다 본격적으로 그 위에 오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마치 운동을 하기 전 예열하는 것처럼 그림 역시 천천히 예열을 시작하는 것이다. 1주일이 지나 이제 오일 물감을 묻혀 형태를 잡기 시작한다. 단번에 완성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정교하게 형태를 잡아 나갈 테지만 어차피 이번 주에 완성할 수 없다는 걸 아니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릴 수 있는 것들만 우선 그려 넣는다. 부족한 것은, 다음 주에 또 말렸다가 그리면 되니까 부족해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완성할 수 없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매 순간마다 부족해 보이고 더 수정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오일을 올려봤자 더 탁한 색감이 만들어질 뿐이다. 그저 천천히 기다리고 부족함을 감내하며 다음 주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잘못된 것은 바로바로 고쳐야 직성이 풀리건만 고쳐야 할 것을 일주일 기다렸다 고쳐야 하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하지만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모든 것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한 번에 요술 램프처럼 ‘짠’하고 나타나진 않으니까, 지겨울 만큼 인내를 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 작품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올리며 한 주를 기다린다.     




“다시 자리에 돌아오면, 완성은 할 수 있다.”     



일주일 뒤 자리에 앉아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 반쯤 성공한 셈이다. 분명 지난주 유화를 그리고 멈출 땐 반드시 완성해야지!라고 다짐을 하며 멈추었건만 어느새 여러 시간들 속에 ‘유화 그리기’는 저만치 떨어져 있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리기 자체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추면 아예 그림이 죽도 밥도 안 되는 초벌 상태의 미완성이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는 순간 그림 안에 새로운 생명이 되살아난다. 아주 천천히 내 손으로 내가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도화지 속의 세계는 공터가 된다. 하나하나 선을 만들어주고 색을 입혀줄 때 비로소 그림 안의 사람들이 화색이 돌고 명랑해진다. 도화지 안에 세계를 만들어 주는 과정인데 결코 가벼울 수 없다. 내가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지고, 이 안의 사람들의 감정이 달라지고, 어떤 색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고급스럽거나 천박해질 수 있다. 도화지 안에선 천천히 정성을 다해야만 또 다른 세계가 창조된다.   


한 주, 두 주, 천천히 기다림과 고민의 시간이 쌓이다 보면 나만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게 된다. 사진을 찍으면 찰나를 포착하지만 그림을 그리면 독특한 분위기가 탄생한다. 몇 주에 걸쳐 한 장면을 나만의 프레임 안에 재창조해 만든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시간을 음미하며 6주라는 대장정으로 유화 한 점을 만들었다. ‘6주간 겨우 한 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유화 한 점은 모든 일은 서두른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게 말해주고 있다. ‘유화’라는 작품 자체가 서둘러 하루 만에 완성할 수도 없는 그림이고 그렇게 그려서도 안되니까 빨리 달려가는 내게 천천히 기다리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할까?      



마음이 유난히도 불안할 때, 재빨리 뭔가를 성취하고 싶을 때 천천히 유화 물감을 꺼내 작품을 하나 그려야겠다. 빨리 달려가는 나에게 ‘세상 일은 한 번에 되지 않는 것도 많다는 걸’ 넌지시 알려주는 유화를 그리며 천천히 시간을 음미해보면 내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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