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우연한 기회를 얻기까지
그림 그리는 자체가 좋아 잠자기 전, 중간중간 이동할 때마다 틈틈이 그린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공부를 했고, 취업을 하기 위해 토익책을 펼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뭔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림 그리는 자체가 작은 위안을 줘 오늘도, 내일도 차곡차곡 그림을 쌓아가고 있다. 그림 그리는 소재는 그때그때마다 다른데 주로 여행지의 풍경을 그려보기도 하고 남편과 대화를 나눴던 시간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면 무엇이든 화폭에 옮기며 즐거운 상상에 빠지곤 한다.
좋았던 기억을 화폭에 담으며 집에만 쌓아두기가 아쉬운 마음에 조금씩 그림과 함께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게 2012년부터 블로그에 틈틈이 글을 올린 셈이니 벌써 8년째 틈나는 대로 그림과 글을 함께 써서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웹페이지 상에 올려둔 셈이다. 뭔가를 바랐던 것은 아니고 그저 내 그림을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어느 단체에서는 초청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했고 책 표지에 내 그림을 싣고 싶다고 계약하자는 출판사도 있었다. 내 그림을 책 표지에 써야겠다고,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단 그림 그리는 과정을 중간중간 보여줬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기회들이 내게 주어지고 있었다.
가끔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내가 맡고 싶은 업무가 생길 때가 있다. 주로 서비스나 새로운 상품에 대한 기획 업무에 관심이 많은데 정작 주어지는 업무는 다를 때 혼자만 상심하곤 했다. 그러다 하반기 성과에 대한 면담을 팀장님과 하게 되었다.
“팀장님, 저는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컨셉을 발굴하는 업무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래? 관심이 있다면 그동안 내게 왜 성과를 안 보여줬지?”
팀장님께서 제게 재미있는 업무를 안 주셨으니까 그렇죠!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팀장님 입장에선 나에 대한 신뢰와 정보가 없으신 상태에서 중요한 업무를 분배하기가 난감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문득 그림 그릴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결과를 바라지 않고 그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천천히 보여주었을 뿐인데 새로운 기회가 내게 찾아왔던 잔상이 머릿속에 살며시 나타났다.
‘그저 보여주기만 해야지.’
결과만 너무 앞서 생각하면 내 마음만 쓰리니 천천히 내가 할 수 있고 관심이 있는 업무 위주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저 하루 일과 중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업무, 좋아하는 업무를 하면서 결과물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 성과를 인정받거나 더 중요한 업무를 배정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증명해 나가는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림 그리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듯 비록 미숙할지언정 내가 하는 업무를 보여주었다.
과정들을 천천히 보여주고 증명하면서 자연스레 과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굳이 이 업무를 담당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몇몇 흥미로운 기회들이 내게 찾아왔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천천히 내게 노크를 하듯 찾아오듯 내가 관심이 있을만한 업무들이 천천히 내게로 왔다. 그저 나는 관심 있는 것들을 꾸준히 하면서 천천히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요즘에는 영화에 관심이 많아 영화 포스터나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 역시 천천히 그리면서 그저 사람들에게 요즘 내 작품이 이렇다고 살며시 보여주기만 한다. 이 그림이 어디서 어떻게 전달될지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천천히 내가 보여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그 씨앗이 멀리멀리 날아가 흥미로운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어도 그저 이 과정에 흠뻑 취해 천천히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열심히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분명 성장할 테고 좋아하는 시간을 만끽하는 동안 만족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다. 그러니 오늘도 연필을 꺼내 천천히 그림을 그리며 이 과정을 차곡차곡 공유하고 보여줘야겠다.